경성지부 돈암동 회관 신축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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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지부 돈암동 회관 신축되다
  • 박혜현 교도
  • 승인 2020.03.1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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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원문화해설단과 떠나는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 8

원기18년 5월 6일에 이완철·이동진화(여성담당교무)가 경성지부 제6대 교무로 부임한다. 며칠 후 대종사와 이공주가 상경하며 돈암동 회관 건축 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창신동 경성출장소를 판 돈 750원과 그동안 경성지부 회원들이 모아온 수백 원을 합해 공사비 총 1300원을 건축 예산으로 세우고, 7월에 익산 총부에서 상경한 오창건이 건축위원을 맡아 공사가 시작된다.

공사 중 대종사는 두 번 상경해 한 달 이상씩 머물며 신축 공사를 감역한다. 불법연구회 최초의 신축교당이니 대종사의 애정이 오죽했을까. 공사 감역 중에 대종사는 인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에게 돌아오는 죄와 복은 부처나 조상이나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과 육근 작용에서 나오니 주의하고 조심하라는 ‘음조와 음해의 출처에 대하여’라는 설법을 설한다. <대종경> 인과품 15장에 수록돼 있다.

4개월의 공사기간 동안 이성각·김영신 모녀가 공사 뒷바라지를 하는데, 이성각은 바느질품을 팔아가며 공양을 올렸다. 공사 하는 중 어느 날 김영신이 공양에 사용할 콩을 까고 있는데 대종사께서 콩 까는 일을 도와주며 “'이것 봐라, 총부에 초상이 났다” “예? 초상이라뇨?” “청춘이 모친 설상화가 열반했다” “어떻게 그리 아십니까?” 하고 여쭈니 “다 아는 수가 있다”고 말한다.

김영신은 대종사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 날 이청춘의 모친 김설상화가 열반했다는 연락을 총부로부터 받았다고 김영신은 훗날 회고했다. 경성출장소 돈암동 신축공사는 대종사와 오창건의 감역으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대종사는 공사감역이 끝나면 공양을 마친 후 뒷산인 낙산에 올라가 오창건·정일지 두 제자를 데리고 산이 울리도록 염불시간을 가졌다.

공사가 한창인 9월 중순에, 김영신은 총부 상조부 서기로 발령받아 문서정리차 총부로 내려가게 된다. 대종사는 김영신의 의복 상자를 가리키며 이완철에게 “이 짐을 경성역까지 지고 가자”하니 이완철이 교무의 체면상 난처하다며 거절한다. 이에 건축 감역을 하던 오창건에게 짐을 지우고 경성역에 다녀오신 후, 이완철에게 전무출신의 본분에 대해 말씀하신 이야기는 <대종경> 교단품 11장에 나온다.

감역을 맡은 오창건은 불법연구회가 시골 영광에서 시작되어 경성에 지부까지 건축하게 되니, 어려웠던 과거가 생각나는 동시에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되어 기쁨으로 잠을 이룰 수 없어 밤 새워 공사를 추진했다고 한다.

이런 오창건을 곁에서 본 대종사는 총부 예회 때 “어떠한 괴로움도 낙으로 삼을 줄 아는 이가 행복한 사람이다”는 주제로 설법하며 오창건을 칭찬한다.

경성출장소 돈암동 회관은 1300여 원으로 공사를 시작했으나, 증액되어 2000여 원의 공사비가 들어갔고 더위와 비바람을 무릅쓰고 4개월 만에 완공이 된다. 드디어 원기18년 11월 3일에 경성지부 돈암동회관 신축 낙성식이 거행된다.

경성지부 돈암동 회관은 일식과 양식이 절충된 신식 12칸 목조 기와집으로 법당에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기존에 있던 별채 건물까지 합하면 20여 칸이 넘었다.

신축된 경성지부 돈암동 회관은 독립된 법당을 가진 교단 최초 건물이었고, 지방 최초로 조실까지 갖추었다. 또한 회관 옆에 종각을 만들어 설법 전에 법종을 치는 설법 예의 시행지이기도 하다.

경성지부 교무 이완철은 ‘경성지부 신축낙성에 제하여’라는 글에서 “이동진화가 뿌리를 숨기고, 이공주는 줄기와 가지를 배양시키고, 지환선과 여러분은 잎과 꽃을 피게 한다”고 경성지부 돈암동 회관 신축 유공인들을 평했다.

 

3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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