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열린날_영상설교] 대종사 구도과정에 나타난 자타력 병진 회상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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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열린날_영상설교] 대종사 구도과정에 나타난 자타력 병진 회상의 출현
  • 한덕천 발행인
  • 승인 2020.04.18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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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한덕천 서울교구장 설법
주제_대종사 구도역정의 역설

 

대종사님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다생 겁래를 통해

회상을 여시면서 때로는 신앙중심의 회상을 여셨을 것입니다.

종교역사를 보면 인류는 절대자를 향한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구했으며,

그 시대에는 그런 종교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종교계는 이런 종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일변도의 가르침은 이미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기적중심의 신앙편향적인 종교는 과학기술의 개벽과

탈종교와 무종교시대에 위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많은 불편을 감수하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여 암울했던 코로나의 정국으로부터 희망을 만들어준 교도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모두의 합력으로 이 나라는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미래학자인 짐 데이터씨는 “한국은 현재 그 어느 때보다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으며, 세계 많은 국가가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을 롤모델로 지켜보고 있다. 지금의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치지 마라”라고 했으니, 새로 국회의원이 된 정치인들이 중심역할을 잘해주길 바랍니다. 역사 이래로 이렇게 한국이 세계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성과에 대해 원불교인들은 한 체성과 한 근원임을 깨우쳐주시고,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사은을 깨우쳐주신 대종사님께 감사와 찬송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법회에 말씀드렸듯이 대종사님은 “다생겁래로 많은 회상을 열어왔다”라고 하셨고, 정산종사님도 “대종사께서 이 회상 여실 준비로 이 땅에 여러 번 나시었다”라고 하셨는데, 다생 겁래에 많은 회상을 열어왔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까요? 물론 영통을 한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일이겠지만, 그런 영통의 능력을 갖진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다만 원불교인은 믿기만 하고 타인에게도 믿으라고만 하면 될까요?

지나치게 주관적일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대종사님의 대각이전 구도역정 속에 자그마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그 역설을 찾아보겠습니다.

원불교에서는 대종사님의 일생을 십상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 십상에 대해 대산종사께서는 “대종사십상은 우리 교단의 청사진이요 수만대의 설계도이다. 대종사님을 세세생생 모시고 따라다니려면 대종사님 십상을 연구해서 누구나 대종사님을 쉽게 알아 뫼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강남교당을 신축하면서 이야기가 있는 교당 즉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교당을 염원하였고 교도님들에게 건물을 자랑하지 말고 교도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가 자랑스러운 교당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원불교에 가장 핵심이며 최고의 스토리텔링은 대종사님 일생이라고 생각했기에 강남교당에 담아내고 싶었으나 시간적으로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태산기념관에 와보니 건물 이름은 [원불교소태산기념관]인데 소태산 대종사님을 만날 수가 없어 아쉽고 아쉬웠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해 특별한 인연을 만났고, 목공예를 하는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분의 평생 바램과 제 염원이 서로 응하여 대종사님의 십상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여 역사에 남을 성물불사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소태산기념관에 들어오면 대종사님의 일생을 보고 들으며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성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십상을 통해 대종사님께서 “내가 다생 겁래로 많은 회상을 열어 왔으나 이 회상이 가장 판이 크다”는 말씀을 확인하게 하고 싶습니다. 대종사님 십상속에는 다생 겁래로 많은 회상을 열어 왔다는 것과 이제는 새 회상을 열어야만 될 새종교로서의 [원불교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십상 중 가장 첫 번째가 관천기의상이죠? 
풀어 말하자면 하늘을 보시고 의문을 가졌다는 발심동기를 함축하는 용어입니다.

과거의 종교들은 대부분 교조의 출생을 신격화하고 신비화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불교는 석가세존은 탄생 이전의 전생사로 인간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도솔천의 호명보살로 머물렀고, 룸비니동산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로 태어나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선언하였다는 것으로 신격화하였습니다. 최근에 부활절을 보낸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났다고 말하여 이 또한 예수님을 신격화하였습니다.

저는 근기가 낮아 처음 원불교에 입문하여 대종사님은 이런 신비한 출생이 없는 것이 실망스러웠습니다. 처음에 원불교에 대한 종교적 귀의 감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교법에 눈이 열리면서 선천시대와 후천시대의 확연한 구별이 이 출생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출생을 신격화하고 신비화하는 종교영웅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아직도 선천시대의 방법으로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이 잊을만하면 구세주를 자처하면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지만 후천개벽의 시대는 스스로 자멸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대종사님은 다생 겁래에 많은 회상을 여셨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회상이 필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신비나 이적으로 신격화된 신앙으로는 이제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오신 성자들은 특별한 분들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래서 출생부터 장엄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종사님은 출생을 신비화하여 장엄하는 것으로 다생 겁래의 역할을 장엄하지 않으시고, 다생겁래의 서원을 이뤄가는 발심동기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석가세존의 발심동기는 동서남북 성문을 나가 인간들의 고통을 보았고, 그 고통을 벗어날 길을 찾아서 수도의 길을 나섰습니다. 그래서 고행난행의 구도를 통해 결국 깨달음을 얻으셨고, 생노병사의 고해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성제법문을 잉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성장 과정과 배경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알려진 발심동기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처음에 세례 요한의 그룹에 속하였다가 메시아를 갈구하는 민중의 뜻을 실현하고자 40일 광야에서 기도하고 기독교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대종사님은 비록 다생겁래의 서원으로 오셨지만, 역겁에 뭉친 서원으로 하늘을 보고 의문을 품고, 인간사에 의문을 품는 것이 발심동기가 되었습니다.

우주자연현상과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의문으로 발심하여 구도의 첫걸음을 떼게 되셨는데, 이 의문은 결국 새로운 회상이 응답해야할 새 종교의 요구였습니다. 과거 종교처럼 지역적 문화적 장벽의 시대가 아닌 우주일가를 이뤄가는 미래시대에 적합한 주세불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의문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두 번째는 삼령기원상입니다.
11세 되던 해 어느 가을날 문중의 시향제에 참석했다가 불가사의한 힘을 가졌다는 산신(山神)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이때부터 산신을 직접 만나서 모든 의심을 해결하리라는 기대감으로 삼밭재 마당바위를 오르내리면서 5년간이나 지성으로 기도정진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삼밭재 마당바위까지 길이 닦여 승용차로 갈 수 있지만 당시 기도터에 오르는 길을 11살 나이에는 감당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무려 5년간을 오르내리면서 산신을 만나고자 하셨습니다. 얼마나 우주자연과 인간사에 의문이 깊었으면 그런 모험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구도의 과정을 밟았을까?

이 기간에 절대적인 초월자가 죄복을 주재하고 생사를 주재한다고 생각했던 과거 종교의 발자취를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전통적인 타력신앙을 체험하시면서 의문을 풀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삼령기원상은 대종사님께서 다생겁래에 타력신앙의 교문을 열었던 습성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그때 산신을 만나셨다면 원불교는 태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천시대를 대표하는 종교의 주류 중에 하나는 타력신앙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원불교가 타력신앙중심의 종교가 되었다면 후천시대를 선도하는 종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대종사님이 산신을 만나지 못한 것이 당연한 것으로, 삼령기원상은 나중에 원불교의 신앙을 세우는 밑바탕이 되어 자신할만한 타력을 얻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삼령기원상은 일원상 신앙의 근간을 이룬 구도과정이었고, 신앙일변도인 종교를 넘어서기 위한 체험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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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님은 다생 겁래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깨달음 중심의 수행일변도의 회상을 열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생에서 전생의 경험대로 자연스럽게 스승을 찾아

그 해답을 구하셨을 것입니다. 세계의 종교 중에

깨달음을 추구하거나, 도를 구하겠다고 수행하는 단체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산속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고,

단체들이 날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행일변도의 종교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대종사님은 수행종교의 핵심인

스승을 만날 수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연한 결과였다고 봅니다.

세 번째는 구사고행상입니다.
16세 되던 해 봄, 고대소설 《조웅전》을 접하시는데, 주인공이 도사를 만나 신통 묘술을 배워 크게 성공하고 모든 소원을 다 이루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때부터 보이지 않는 산신을 찾는 것보다, 인간과 똑같은 형상을 가졌다는 도사를 만나서 모든 의심을 해결해 보리라는 결심으로 일명 도사를 찾아 온갖 고행을 거듭하게 되었던 과정을 말합니다.

대종사님은 우주자연과 인생에 대한 의문을 타력신앙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법계는 응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종사님은 구도의 전환을 가져옵니다. 도사를 통해서 그 의문을 해결하고자 한 것입니다. 도사는 수행에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스승은 깨달음으로 인도해주는 인도자이고, 증명자이기 때문입니다.

대종사님은 다생 겁래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회상을 열 때 수행중심의 회상을 여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인도해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스승을 찾는 구도의 전환기를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온갖 이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때로는 가정에도 소홀하고, 가산도 탕진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의문을 해결해줄 스승을 만나지 못하셨습니다. 아니 만날 수 없는 것이 진리계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스승을 만나서 문제를 해결했다면 원불교는 수행편향적인 종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불교가 태동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문제를 해결해주는 스승을 만났더라면 원불교는 그 종교의 종파가 되었을 것이고, 새 종교가 될 수 없었고, 대종사님은 새 시대의 주세불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열고자 하셨던 새회상은 수행일변도적인 과거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응답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네 번째는 강변입정상입니다.
타력신앙의 상징인 산신과 수행중심의 상징인 도사를 만나고자 하였지만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진리가 응하지 않았는데, 대종사님은 절망하지 않고, 이때부터 “내 이 일을 장차 어찌할까?” 하는 한 생각에 몸도 마음을 잊게 됩니다. 때로는 우연히 떠오르는 주송을 외우기도 하고 때로는 등상처럼 우두커니 한곳에 서서 깊은 명상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24~25세경을 전후해서는 일체의 사량 분별을 잊어버리고 큰 정(大定)에 종종 들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정말 절망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력신앙으로도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고, 수행만으로도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기에 백천간두에 서 있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한 생각뿐이셨고, 궁극에는 그 생각마저도 돈망한 상태로 깊은 나가대정에 드셨을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다생 겁래를 통해 회상을 여시면서 때로는 신앙중심의 회상을 여셨을 것입니다. 종교역사를 보면 인류는 절대자를 향한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구했으며, 그 시대에는 그런 종교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종교계는 이런 종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일변도의 가르침은 이미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기적중심의 신앙편향적인 종교는 과학기술의 개벽과 탈종교와 무종교시대에 위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또한 대종사님은 다생 겁래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깨달음 중심의 수행일변도의 회상을 열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생에서 전생의 경험대로 자연스럽게 스승을 찾아 그 해답을 구하셨을 것입니다. 세계의 종교 중에 깨달음을 추구하거나, 도를 구하겠다고 수행하는 단체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산속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고, 단체들이 날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행일변도의 종교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대종사님은 수행종교의 핵심인 스승을 만날 수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연한 결과였다고 봅니다.

후천개벽의 주세불로 열고자 하신 회상은 과거와는 다른 가장 판이 큰 완전무결한 회상으로 자타력을 병진하는 종교였기에 대각 이전의 구도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며, 그 구도과정에 다생 겁래로 많은 회상을 열어왔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학인과 대산종사님의 문답으로 정리하겠습니다.

학인이 여쭙기를 "하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과거에는 상제님이나 부처님이나 하나님 한 분만을 절대자로 모셨으나, 수운 대신사께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 하여 종교 혁명을 일으켜 주셨고, 대종사께서는 ‘곳곳이 부처님이니 일마다 불공을 하라.’ 하시어 더 큰 종교 혁명을 일으켜 주셨으니, 앞으로는 자력과 타력을 원만히 병진하는 수행과 신앙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느니라."라는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합장하고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옵신 법신불사은이시여!

인류구원의 수레바퀴 한 축을 담당하는 정치의 국회의원선거가 코로나의 어려운 여건속에서 원만히 마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선출된 사람들에게는 축하와 한국의 미래를 밝게 열어주게 하옵시고 낙선자들에게는 위로와 함께 그 열정을 국가발전에 합력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 나라가 어변성룡이 되어 세계가 주목하는 동방의 새불토가 되기를 비옵나이다. 또한 속히 코로나19를 소멸하여 법회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일상생활이 정상화되어 침체된 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직장으로 다시 돌아가 새로운 활력을 만들어가길 염원하옵나이다.

영명하옵신 법신불사은이시여!

영산회상의 봄소식이 다시온 원불교열린날이 다가오는 이때에, 오늘은 대종사님의 구도과정을 통해 다생 겁래로 많은 회상을 열어오셨다는 것을 엿보고자 하였나이다.

기도중심의 신앙일변도의 신앙과정을 통해서 깨달음 중심의 수행일변도의 수행과정을 통해서 미래의 종교는 어느 일변도의 편향적인 가르침으로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직접 구도과정으로 보여주셨고 과거 종교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보여주신 구도과정을 찬탄하며 판이 큰 회상에 입문함을 찬양하고 감사하나이다.

저희들은 자력과 타력을 원만히 병진하는 수행과 신앙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스승님 말씀에 신심을 세우고 정진하고 정진하겠사오니 대종사님의 가르침이 저희에게 또한 인류에게 희망임을 증명하게 하옵소서.

일심으로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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