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아, 무시선법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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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아, 무시선법②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0.06.16 21:23
  • 호수 11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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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22

“사람이 만일 참다운 선을 닦고자 할진대 먼저 마땅히 진공(眞空)으로 체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을 삼아.”

일반적인 경전의 구성처럼, 무시선법도 그 골수(骨髓)가 다 앞부분에 있습니다. 위 문장은 실질적으로 무시선법의 첫 구절인 동시에, 무시선 공부법의 골자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위 구절은 무시선법의 대의(大義)에 해당합니다. 높은 근기의 수도인이라면 이 구절을 읽고 나면 더는 읽을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진공(眞空)이란 말 그대로 참다운 공(空)입니다. 그냥 공이 아니라 왜 진공이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은 있고 없음[有無]을 초월한 공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여기서 가장 큰 의문이 시작됩니다. 도대체 어떠한 것, 어떤 자리를 두고서 있고 없음을 초월하였다고 하는가? 이것은 그 누구라도 아직까지 설명할 수가 없는 부분입니다. 이 진공은 오로지 깨달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물을 있다, 없다라는 양분(兩分)된 개념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지능으로는, 진공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진공은 허공을 포함한 일체 모든 것의 근본이자 주체(主體)로써, 언제나 현실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묘유(妙有)란, 진공과 다르지도 같지도 않은 것으로, 이 진공이 스스로 나투고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온 우주만유가 진공이 드러내고 있는 묘유이며, 나의 몸과 나의 의식과 나의 행동이 모두 진공이 나투고 있는 묘유입니다. 즉, 일체 모든 것[萬法]의 근본 주체(主體)가 바로 진공이며, 무엇이든 모두 드러나 있는 유형, 무형의 존재가 곧 묘유입니다. 그러므로 진공과 묘유는 이름은 둘이지만 둘이 아니며, 따라서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진공묘유는 진리의 속성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성의 속성입니다. 우리의 성품은 언제나 진공묘유입니다. 다만, 부처는 이 진공묘유를 늘 원래 그대로 사용하는데, 중생은 이를 흔히 왜곡시키거나 굴절시켜서 씁니다. 이 왜곡 굴절시키는 과정에 경계(사실은, 각자의 무명습기(無明習氣))가 있습니다.

가령, 사람이 TV 드라마를 보면서는 사리 구분을 잘 하는데[진공묘유], 자기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구분이 틀어집니다[묘유의 왜곡]. 평상시 마트에 갈 때는 필요한 것들만 사는데[진공묘유], 세일을 한다고 하면 굳이 필요 없는 것도 사려고 합니다[묘유의 굴절].

이처럼 자성은 언제나 진공묘유를 나투는데, 중생이 (자신의 무명 업습(業習)에 따라) 문득 경계에 끌려가 집착하는 순간,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왜곡, 굴절되어 나옵니다. 그래서 경계에서 자성의 진공묘유를 그대로 나투면 부처이고, 이것을 왜곡 굴절시키면 범부중생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선은 내 성품의 진공묘유를 그대로 나투는 것이며, 이것이 진공을 체로, 묘유를 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공으로 체와 용을 〈삼으라〉고 한 것은, 부처는 늘 진공묘유를 그대로 나투는데, 중생은 자신의 진공묘유를 흔히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진공묘유는 원래 누구에게나 다 온전해서, 옛말에 도둑이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구해놓고 간다고 했는데 바로 이 진공묘유의 작용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거짓말을 해서 묘유를 왜곡해놓고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나는 것도 이 진공묘유의 작용입니다.

공부인이 어느 날 이 진공묘유를 스스로 체험하게 되면, 무시선법의 진수(眞髓)가 이 한 구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우의 공즉시색라도현화정교당 교도
나우의 공즉시색
라도현
화정교당 교도

 

 

6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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