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교강 선포 100주년, 변산제법성지③]봉래계곡 굽이굽이 경전 아님 없으니
상태바
[원불교 교강 선포 100주년, 변산제법성지③]봉래계곡 굽이굽이 경전 아님 없으니
  • 강법진 편집장
  • 승인 2020.07.21 15:27
  • 호수 117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불교 교리 강령 선포 100주년, 변산제법성지를 가다③
▲석두암 터.
▲석두암 터.
▲봉래정사에서 월명암으로 가는길.
▲봉래정사에서 월명암으로 가는길.

[한울안신문=강법진] 소태산 대종사가 지친 심신을 휴양하고자 변산으로 들어왔지만, 실은 이곳에서 남녀 제자들을 모아 실질적인 회상 창립의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원기5년 4월에 교강을 선포하고 교리로서 제도 방편을 베푸니, 제자들은 날로 불어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월명암에 상좌로 지내던 정산종사도 밤마다 험한 산길을 한달음에 내달려 스승을 만나 교리문답 하는 기쁨으로 살았다.

이를 지켜보던 제자 김남천·송적벽은 실상초당 위에 초가삼간을 하나 더 마련하자고 발의한다. 이에 월명암 주지 백학명 선사가 목재를 보조하고, 송적벽이 터를 닦고 김남천이 목수 일을 맡아 2개월 만에 초당을 완공한다. 원기6년 9월 석두거사(소태산의 당시 칭호)가 머물 석두암이 한 채 완성된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기존 실상초당을 여제자들의 거처로 내어 주고, 석두암은 자신이 윗방을, 남제자들은 아랫방에 머물게 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자들에게 근기 따라 교리를 설하며, 정법의 이해정도를 파악했다. 때로는 점점 늘어나는 제자들과 10인 1단의 조단 교화도 시도해 보고, 불교 스님들과 거래하며 조선불교혁신론의 초안을 잡았다. 특히 대종사는 과거와 같은 견성인가와 등상불 신앙은 모든 이들로 하여금 대도에 들지 못하게 하는 법이니, 이를 개선하여 사실적이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가 되는 교법을 제정하는 데 고심했다.

당시 대종사의 가르침의 본의를 엿볼 수 있는 법문이 <대종경> 실시품 2장(인장바위)과 교의품 15장(실상사 노부부)에 잘 나타난다. 대종사는 참선하지 않는 제자를 크게 나무라는 노승들(백학명 선사와 한만허 화상)의 하소연을 듣고 (인장)바위를 가리키며 “제가 지금 스님들께 저 바위 속에 금이 들어있으니 바위를 부수고 금을 채굴하라면 제 말을 믿고 바로 채굴하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지 못하겠다는 선승들에게 대종사는 “확신도 없는데 강제 채굴을 권하면 금을 채굴할 수 없듯이, 참선에 대한 취미도 모르고 발원도 없는 제자에게 억지로 참선을 권하는 것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영영 참선을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남의 원 없는 일을 강제로 권하지 말며, 권하려거든 먼저 자신이 깨쳐 솔선수범해야 따른다는 가르침은 그 어느 때보다 울림이 크다.

또한 불효하는 며느리가 못마땅해 등상불에게 불공하러 간다는 실상사 노부부를 대종사가 봉래정사 앞에서 만나 ‘며느리가 곧 부처’라고 한 법문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 외에도 ‘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 등 변산구곡 굽이굽이마다 설한 소태산 대종사의 성리법문이 성문으로 또는 구문으로 맥맥히 이어져 오고 있다. 변산성지는 제법성지인 동시에 곳곳에 교조의 깨달음과 교화방편을 읽을 수 있는 한편의 산 경전이었다.
 

▲대종사가 석립청수성의 성리법문을 설한 곳으로 추정하는 봉래계곡
▲대종사가 석립청수성의 성리법문을 설한 곳으로 추정하는 봉래계곡

초여름 변산원광선원 박청화 교무와 동행한 봉래5곡 너럭바위 위에서 잠시 선정에 들었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에 일체 망념을 놓아버리고, 온몸을 감돌고 가는 바람결에 시름을 실려 보냈다. 변산제법성지를 찾는 순례객이나 선원들에게 이곳은 필수코스다. 돌이 되어 물소리를 들으며 성리소식에 한발 더 다가가 보는 시간, 이곳 제법성지에서만 누릴 수있는 특권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정산종사의 큰 그늘에 가려 자칫 우리가 놓쳐버릴 수 있는 주산종사의 신성도 엿볼 수 있다. 그 이야기로 이번 호를 갈무리하고자 한다.

16세 주산 송도성 종사는 형의 인도로 변산에 들어와 스승의 시봉을 전담하게 된다. 하루는 아침식사 후 스승에게 차를 올리고 차 그릇을 씻기 위해 용두샘(실상마을 공동우물, 봉래정사 터 우측 선인봉 아래)으로 들고 나갔다.

그런데 한 나절이 지나도 오지 않자 대종사가 궁금하여 샘으로 갔다. 그때 도성이 우물가에서 차 탕기를 잡고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대종사는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묻는다. 도성은 “제가 부주의해서 차 탕기 꼭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라며 이실직고하자 대종사 “이미 깨진 걸 어쩔 것이냐, 실수로 깨뜨렸으니 앞으로 조심하고 그만 들어오너라” 하고 용서한다.

이후 소태산은 제자들에게 무슨 일을 당부할 때, 매사에 정성스럽고 진지했던 주산종사 이야기를 비유하며 “도성이(가) 깨진 그릇 붙이듯이 하라”고 가르친다. 용두샘 우물가에서 깨진 차 탕기를 이리저리 맞추며 안절부절 애를 태우고 있는 소년 송도성. 구정선사의 신성에 가려 스승을 향한 제자 송도성의 오롯한 그 신성이 곁에 두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우리네 원석 같아 부끄럽고 기쁜 마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