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준비하는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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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준비하는 연습
  • 이여진 교도
  • 승인 2020.09.08 14:21
  • 호수 11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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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칼럼

장례식장에 가면 사람들은 숙연해진다. 특히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 고인이 된 경우에 그 애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수명이 무한하다면 어떠했을까?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많은 이들은 오히려 그것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이 없다면 자신의 죽음을 그려보는 상상력을 통해 현재의 삶을 성찰하는 시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낙담하게 하기보다는 매 순간의 삶을 더 소중하게 만들 수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며 아무도 피해갈 수 없다. 죽음은 자명한 것이지만 그것이 ‘언제’ 내게 올지 모른다. 그래서 어느 누군가는, 우리 인간이 단지 그 집행일을 모를 뿐 모두 태어날 때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다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생사일여를 말하는 원불교나 불교, 자연의 순리를 강조하는 노자나 장자, 서양의 소크라테스조차도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헬레니즘 시대의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살아있거나 혹은 죽어있거나 둘 중의 하나의 상태에 처해있으며,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결코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우리 인간은 그것을 두려워 한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엄숙하고 품위 있게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죽음을 준비하는 연습이나 죽음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이 세계에 현존하는 그 누구도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없지 않은가. 죽음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실제 체험을 통해 이를 가르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기보다 결국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적절한 시점에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삶의 일회성과 유한성을 직시하고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면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와 망상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그러니 죽음을 삶의 한 귀퉁이에 두고 늘 준비하는 사람은 남아 있는 삶을 충실히 살아가려는 의지로 충만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찰스 디킨즈가 쓴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스쿠루우지 영감의 삶이 바뀔 수 있었던 것도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수용의 과정은 단지 노인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죽음이 찾아오는 시간은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모든 이들을 철학자로 만든다”는 몽테뉴의 말처럼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관심을 제고할 수 있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는 연습을 통해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줄이고, 죽음을 슬프고 비통하게 여겨야 할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생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 존재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아름다운 인생의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울안칼럼
이여진
강남교당 교도
서울교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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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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