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구차히 처소와 동정을 말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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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구차히 처소와 동정을 말하리요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0.10.20 15:57
  • 호수 119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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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30
나우의 空卽是色 라도현 화정교당 교도

무시선법 10

「이 법이 심히 어려운 것 같으나 닦는 법만 자상히 알고 보면 괭이를 든 농부도 선을 할 수 있고, 마치를 든 공장(工匠)도 선을 할 수 있으며, 주판을 든 점원도 선을 할 수 있고, 정사를 잡은 관리도 선을 할 수 있으며, 내왕하면서도 선을 할 수 있고, 집에서도 선을 할 수 있나니 어찌 구차히 처소를 택하며 동정을 말하리요.」

무시선법에서 강조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온 것들입니다. 이제부터는 그에 덧붙이는 말로, 무시선법을 닦는 것이 실제로는 그리 어려운 공부가 아니라는 내용입니다.

비록 무시선법을 잘 알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아마 위의 문장은 다들 읽거나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괭이를 든 농부도, 마치를 든 장인도, 주판을 든 점원도, 정사를 잡은 관리도 이 선을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도대체 이 세상에 할 수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무시선법이 어려운 이유는 단 하나, 이 공부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즉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자의 말씀도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무용지물입니다. 우리 무시선법이 지금까지 그 진가가 드러나지 못한 것도 그 뜻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법의 핵심을 알려면 지금부터라도 이 법을 올바로 아는 데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지와 잎사귀를 두고 교법의 뿌리라고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뛰어난 수행자가 나올 수 없습니다.

“어찌 구차히 처소(處所)를 택하며 동정(動靜)을 말하리요.” 이 구절은, 수행하는 데에 여러 방법을 따지며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입을 닫게 하는 한마디입니다. 무시선법은 이처럼 때와 장소와 경계를 전혀 가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칫 맨 마지막에 나오는 무시선법의 강령을 들어 ‘동할 때’의 공부와 ‘정할 때’의 공부가 다르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선을 닦는 사람은 마음이 마음대로 잘 되지 아니하여, 마치 저 소 길들이기와 흡사하나니, 잠깐이라도 마음의 고삐를 놓고 보면 곧 도심을 상하게 되나니라. 그러므로 아무리 욕심나는 경계를 대할지라도, 끝까지 싸우는 정신을 놓지 아니하고 힘써 행한즉, 마음이 차차 조숙(調熟)되어 마음을 마음대로 하는 지경에 이르나니, 경계를 대할 때마다 공부할 때가 돌아온 것을 염두에 잊지 말고 항상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만 잡아갈지니라.」

이 무시선법을 말할 때 어떤 이들은 “경계를 대할 때마다 항상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만 잡아가라”는 대목을 무시선 공부의 핵심으로 인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위 구절은 이 공부의 초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차차 조숙되어 가는’ 공부인에게 한 말씀입니다.

경계를 대할 때 단지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만 잡는 것은 무시선의 초기 수행자에게는 크게 도움이 안 되는 방법입니다. 초보자들은 무시로 많은 분별 주착이 일어날 뿐 아니라, 자신이 그런 줄조차도 모르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만 잡는 것으로는 이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앞의 주요 법문들을 건너뛰고 단지 대중만 잡으려고 해서는 무시선법 전반에 대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10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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