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 회장의 편지에 붙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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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건희 회장의 편지에 붙여서
  • 박시형 교도
  • 승인 2020.11.02 21:06
  • 호수 11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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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기고
박시형(본명 영준)
강남교당 교도
서울대학교 연구교수
지능형반도체포럼 위원장

지난 30년간 삼성 그룹을 이끌었던 이건희 회장이 작고했다. 고인의 생애가 언론과 SNS를 달궜다. 특히 한국 IMF 위기 후 삼성전자를 세계 일류회사로 도약시킨 그분의 리더십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그분이 병석에서 썼다는 편지가 그 진위 여부를 떠나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인생의 전반전에서 아무리 돈과 권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건강을 잃으면 모두 소용없어지고, 결국은 건강만이 남는다는 회환을 잔잔히 그려내고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 ‘전반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던 나는 후반전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패배로 마무리짓지만, 그래도 이 편지를 그대들에게 전할 수 있음에 따뜻한 기쁨을 느낀다네.’

많은 사람들에게 고인의 진솔한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이 편지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분의 측근에서 근무한 분이나, 아니면 그저 그분의 심정을 헤아린 사람이 썼더라도 그것이 그분이 남긴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는 수많은 경전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상기하자.

필자는 고인과 대면한 일이 없지만, 같은 시대 반도체 연구, 교육, 그리고 국가 정책 기회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고인의 편지에 대한 답장의 형태로 고인 스스로도 몰랐을지 모르는 가치를 생각하고 이를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편지에서 ‘무한한 재물의 추구는 나를 그저 탐욕스런 늙은이로 만들었다’는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고인이 키우신 회사가 겉으로는 재물을 추구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재물 추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우리에게 남겨 줬습니다. 고인이 키우신 삼성에서 80~9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류로서 자랐습니다. 좋은 반도체를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파는 과정에서 세계 일류 IT업체를 알게 되었고, 또 이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현재 세계 일류가 된 것은 삼성이 키운 인재 덕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광복 이후, 산업화 길을 추구했지만 우리는 항상 삼류였습니다. 80년대 필자를 비롯해서 외국에서 살아본 사람은 매장에 전시된 일본의 전자제품을 보면서, 3류 국가가 가지는 한계와 열등의식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매장에서 한국산은 항상 가장자리에서 값싼 제품으로 멸시를 당하는 신세였습니다.

반도체 국제학회에서 기세등등하게 외국학자들과 토론하는 일본 젊은이들 옆에서 기 한번 펴보지 못하고 서 있던 우리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더구나 그들 회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첨단 군함을 만들어 청나라, 러시아를 초토화시킨 일본 회사들입니다. 현재 컴퓨터 칩을 만드는 인텔이라는 미국 회사(삼성전자와 반도체 세계1·2위를 다투는 회사)는 80년대 일본 회사가 메모리 개발하는 것을 보고 진작 사업을 포기했을 정도입니다. 우리의 무의식에 일본은 극복이 되지 않는 상대였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무의식을 단숨에 없애버린 분이 바로 고인입니다.

강렬한 빛의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있습니다.

세계의 강자 회사들과 경쟁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에게 짙은 그림자 역시 남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가정, 사회, 번영하는 국가는

빛을 끄지 않는 나라입니다. 오히려 그림자를 잘 분석해서

빛을 더욱 밝게 만드는 지혜를 찾는 나라입니다.

고인의 편지에서 ‘내가 죽으면 별장, 고급차, 그리고 권력이 쓰레기’라고 하셨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인은 희망이 없던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일류를 남기셨습니다. 그것도 단기간에 말입니다. 인생 후반에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의 소망이며 쉬운 일입니다. 대신, 고인은 젊음을 불태워 ‘반일’만 생각한 우리에게 ‘극일’을 하고 이를 통해서 동반자가 되는 프라이드를 심어 주었습니다.

외국에서 한국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주눅이 들던 우리를 우쭐하게 만들어 준 데에는 고인의 역할이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식과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은 항상 적당히 만족하고, 남 탓에 젖은 마음을 바꾸어 세계에서 일류가 될 수 있다는 씨앗을 심은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강렬한 빛의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있습니다. 세계의 강자 회사들과 경쟁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에게 짙은 그림자 역시 남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가정, 사회, 번영하는 국가는 빛을 끄지 않는 나라입니다. 오히려 그림자를 잘 분석해서 빛을 더욱 밝게 만드는 지혜를 찾는 나라입니다.

고인이 생전에 종교로 가졌던 민족의 가르침 원불교에서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풍랑이 그치었으니 이제는 편안하시리… 한 물건 홀로 드러나 때때로 얼굴 나투니 옛 가지 봄 돌아올 때, 또다시 꽃이 피겠네’라고 노래합니다. 풍랑이 그치었으니, 이제 편히 쉬십시오. 고인이 남기신 고귀한 유산과 가치가 후대들에게 나투어 다시 큰 꽃으로 필 것입니다.

11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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