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서로 부처 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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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서로 부처 되는 세상
  • 전종만 교도
  • 승인 2021.02.16 15:27
  • 호수 1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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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만수원교당 교도하나병원 원장
전종만 수원교당 교도
하나병원 원장

그동안 병원 식당에서 재활작업을 하던 알코올 중독 환우 한 분이 일을 그만두게 됐다. 열심히 일은 하는데 간간이 감정 조절을 못하고 공포감을 조성해서 함께 일하는 조리원 여사들이 같이 일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 이유였다.

“더 이상은 힘들겠습니다. 재활 일은 좀 쉬시면서 다른 계획을 한 번 세워 보시지요…”아무리 위로의 다른 말을 덧붙여도 그에게 들리는 것은 ‘일 그만 하세요’라는 비수 같은 말뿐이었나 보다.

그는 그날 외출을 나가서 귀원하지 않았다. 그동안 어렵사리 유지하던 단주도 깨졌다. 청천 벽력 같은 통보를 받은 다음 날에는 술을 마시고 나를 찾아와 “원장님께서 내게 그러시면 안 된다. 그런 것도 지켜주지 못하시냐”며 연신 원망의 말을 내뱉는다. 눈물을 흘린다. 나는 아무 말도 건낼 수가 없었다. 재활을 위해 마련해 준 일이 원망의 화살이 되어 돌아온 현실에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해생어은(害生於恩). 난 그를 위해 뭘 해줄 수 있을까. 내가 그에게 안긴 상처만큼은 아니겠지만 며칠째 나도 아프다. 그는 3일째 귀원을 하지 않고 있다. 그가 다시 중심을 잡도록 기도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새해 계획을 세우면서 수년 전 정기일기를 뒤척이다가 한 환우와의 경험이 담긴 심신작용 처리 건을 보게 됐다. 그때의 나는 좋은 의도가 뜻하지 않은 나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해생어은의 이치를 깨닫고 마음을 다스렸나 보다. 부처는 ‘깨달은 자’라는데 그럼 그 순간 나는 잠시 부처였을까. 그런데 다시 보니 그런 깨달음은 내 마음만 편하게 했던 것 같다. 그는 여전히 술을 마시고 방황할 텐데 나 혼자 잠시 부처였던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그 깨달음은 옳은 것인가.

원기106년 전산종법사께서 내린 신년법문 ‘집집마다 부처가 사는 세상’은 화두로 다가왔다. 대한민국에 사는 5200만 인구에서 4인 가구 기준으로 가구당 부처가 한 사람씩만 있어도 1300만 명이니 전 세계를 놓고 보면 깨달은 자들의 세상인 용화회상은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처럼 그 광대함을 말과 글로는 다하지 못할 것 같다.

부처는 누구이고 중생은 누구일까.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스쳐 가는 이웃 사람들은 부처일까. 꼬리를 무는 의문들은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그런데 부처 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아내에게는 대들면 안 된다’는 소소한 깨달음을 얻는데도 십수 년이 걸리는데 삶을 관통하는 진리를 깨닫는 데는 얼마나 오랜 시간의 수행이 필요할까. 그래서 ‘서로서로 생불이 되어 서로 제도하라’는 <대종경> 전망품 18장의 ‘서로’의 의미가 더 각별해진다.

부처가 되겠다고 혼자 발버둥 치다가는 시간만 허비하며 공부 길도 놓치고 독선과 착각 속에 살 수도 있다. 스승이나 도반들과 함께 나누는 문답감정이 꼭 필요한 이유다. 서로서로 잘 배우고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올바른 깨달음의 길을 함께 가야 한다.

심리학에서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독립성뿐 아니라 상호의존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전지전능하지도 완전하지도 않기 때문에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살아가야 한다. 깨달음도 예외는 아니다. 스스로 깨닫고(自覺), 다른 사람들과 깨달음을 나누고(覺他) 깨달음을 자비로써 정성스럽게 실행해야(覺行圓滿) 진정한 부처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부처가 되기 위한 길고 쉽지 않은 시간들. 깨달음을 위해 서로서로 돕는 지혜가 필요하다. 

 

2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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