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칼럼] 내 마음의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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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칼럼] 내 마음의 4월
  • 전종만 교도
  • 승인 2021.04.18 02:07
  • 호수 1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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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만 수원교당 교도하나병원 원장
전종만
수원교당 교도
하나병원 원장

하루는 한 청년이 제자가 되고 싶다며 법륜스님을 찾아왔다. 스님은 몇 번을 거절하였으나 너무 절실하게 간청해 일단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문경에 가면 한 스님이 계시니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3년 동안 정진하라고 했다.

하지만 청년은 며칠 만에 문경에서 돌아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법륜스님 밑에서 있기를 요구했다. 당신만이 내 스승이 될 자격이 있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 보내느냐며 자신을 받아달라고 고집을 피웠다. 말로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르겠다고 했으나, 행동은 자기 뜻대로 해달라고 떼를 쓴 것이다.

그는 법륜스님을 존경한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든 법륜스님에게 사로잡혀 진짜 법륜스님의 명령은 귀에 안 들렸을 것이다. 자기라는 상(我相)은 이처럼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에 갇혀 살게 한다. 그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오는 변화는 고통스럽고 두렵고 잔인하기까지 하다.

미국의 시인 T.S.엘리엇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4월은 어린싹이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나오라 재촉한다. 하늘은 따뜻한 햇볕을 비추고 대지는 촉촉한 빗물을 머금고 싱그러운 바람의 일렁임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다. 어쩌면 시인은 이 시 ‘황무지’에서 그 저항할 수 없음을 잔인하다고 노래했는지 모른다.

자연의 부름 앞에서 모든 생명체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진리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도 마찬가지다. 진리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자기라는 상을 깨고 나와야 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인정하고 진리가 이끄는 대로 기꺼이 따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내 주관으로 진리를 가늠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신앙은 소태산 대종사께서 밝혀 놓은 진리를 의심 없이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런 믿음 속에서 진정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이라는 책에서 ‘믿기 위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하여 믿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명상의 효과가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일반인뿐 아니라 정신의학계에서도 명상은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동양의 명상문화가 서양의 근거기반(evidence-based) 연구에 힘입어 사람들에게 큰 신뢰를 주고 있다. 이처럼, 보통 사람은 분명히 알아야 믿음을 갖는다. 하지만 신앙인은 지식을 바탕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음으로써 지(智)와 혜(慧)를 얻는다. 우리는 교리의 도덕적인 면만 보고 자칫 신앙적인 면을 간과할 수 있다. ‘윤회라는 걸 어떻게 믿지?’ ‘나쁜 놈들이 떵떵거리며 사는데 인과가 확실히 있는 거야?’ 한다거나 100년도 안 되는 삶의 경험으로 ‘살아보니까 이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하고 교리를 재단하는 것은 진리적 종교를 신앙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나온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신(信)을 오롯하게 하지 못하고 제 재주나 주견에 집착해 트집 잡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의심과 트집은 자기라는 상에서 나온다. 그 상을 깨치고 나와야만 일원상 진리의 신앙문에 들어갈 수 있다. 상을 깨뜨리는 고통, 그것은 힘겹고 잔인하기까지 하지만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다. 그 껍질을 깰 때, 1916년 4월 대각의 시간을 맞이했던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의 뒤를 따라 우리 마음도 4월의 훈풍을 맞이할 것이다.

4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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