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 - 참회문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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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 - 참회문 ⑦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1.08.08 08:30
  • 호수 1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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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47
라도현 교도<br>화정교당<br>
라도현 교도
화정교당

「또는 공부인이 성심으로 참회 수도하여 적적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 천업(天業)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하여」

공부인이 참회 수도하여 「적적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는 말씀은, 정전 무시선법에서, 선(禪)은 「분별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悟得)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예로부터 자성을 깨친 뒤에는 그 즉시[頓修] 영원한 마음의 자유를 누리는 경우와, 깨친 뒤에 자성에 회광반조하는 수행으로써[漸修] 영원한 마음의 자유를 얻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둘 다 ‘자성을 항상 여의지 않음’으로써 완전한 해탈에 이른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번뇌 가득한 공부인이 깊은 구도 수행을 하다가 어느 날 자성을 깨치게 되면, 놀랍게도 그토록 갈망해왔던 ‘마음의 자유’가 이미 자기 성품에 갊아져(內在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때문에 견성한 사람은 해탈문이 제 심지(心地)에 이미 갖춰져 있음을 추호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도인이 ‘분별 주착이 끊어진 자리(성품)에 머문다’고 하는 것과 ‘자력으로 마음의 자유를 누린다’고 하는 것은 서로 같은 말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적영지의 자성을 늘 떠나지 않는 그것이 곧 대자유의 세계, 부처님의 해탈 열반입니다.

마음이 이 경지에 이르면 「천업(天業)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천업을 임의로 한다는 것은 자기가 지은 모든 업력을 뛰어넘어서 바로 자유자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성품은 삼계육도(三界六道) 일체만법(一切萬法)의 근본으로서, 이 자리에 머물러 한순간도 이 성품을 떠나지 않는 부처님은 유상·무상(有相無相)의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습니다.

삼계육도라는 것은 중생 각자가 경계에 끌려서 지은 과보에 의해 벌려진 세계입니다. 중생이 끊임없이 육도세계에 생사거래하는 것은, 오직 분별 주착으로 인해 자성의 지혜광명이 스스로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한 마음이 천만 경계에 끌려가 집착함으로써 천만 업(業)을 지어서 받게 된 결과입니다.

그러나 늘 자성을 여의지 않고 반야(공적영지)의 혜광이 두렷한 부처님은, 이미 삼계를 멀리 벗어났으나, 방편으로 또한 번뇌의 티끌을 일으켜 다시 삼계에 들 수도 있고, 주착심을 일으켜 다시 삼천대천세계에서 태어나는 것[受生]도 자유로이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방편으로 다시 육도를 출입하실 때에는, 뭇 중생의 인연과보를 비춰 보아 사바세계에서 태어나고 죽는 일에 걸림 없이 하신다는 것이니, 실로 완전한 해탈을 얻은 부처님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자재한 능력입니다.

8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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