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에서 온 편지] 적묵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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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에서 온 편지] 적묵산방
  • 유성신 교무
  • 승인 2021.12.13 22:07
  • 호수 12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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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에서 온 편지 9
유성신<br>서울교구 오덕훈련원 원장<br>
유성신
오덕훈련원 원장

빈 몸 하나 들고 햇살과 바람을 마주하며 소소영령한 내 숨소리와 함께 산들 녘의 땅 위를 자유롭게 거닌다. 곡식을 거둔 빈 대지가 부풀어 소복이 솟구쳐 있다. 겨우내 얼마나 얼어서 녹아내리고 수없이 거듭하여야 새로운 땅으로 삭혀 낼까?

눈·비·바람 순역 경계를 딛고 가녀린 신록이 고개를 들기 바쁘게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 내더니 짙푸른 여름을 지나 단풍 곱던 환락의 눈부신 시절도 가고 없다. 자연도 사람도 때가 되면 모든 시절 인연은 왔다가 떠나간다. 그것이 순리이기에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가는 것을 붙들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춘하추동 사시순환의 고리로 또다시 비켜 갈 수 없이 어김없는 때가 찾아 왔다. 훌훌 털어버린 앙상한 가지에 혹한을 딛고 우주 자연의 거대한 질서의 물결로 산야 대지가 온몸을 던지고 있다. 주검처럼 자신을 온통 내어 맡기며 고요와 침묵에 잠긴 적묵산방(寂默山方)이다. 깊은 산골짜기의 겨울은 뿌리에 그 기운을 함축하고 인내하며 생명의 혼을 불어넣는 숭고한 작업이 이뤄지는 때이다.

이 계절에 지금은 나 홀로 떠나는 여행을 할 때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길을 선택하며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잠시 머무는 이곳은 물질계의 인간 몸을 받아 욕망으로 이루어진 욕계의 삶이다. 친근자와 권속의 애정으로 얽히고 물질의 감각적인 욕망을 움켜쥐고 그 쾌락에 중독되어 있지 않은지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 돈, 물질의 재색명리 그리고 수많은 인간관계에 의지하여 바쁘게 살아가는 외형적인 대상이 주는 행복과 즐거움은 언젠가는 떠나가고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나를 칭칭 감고 있는 이러한 울타리로부터 자유로운 영혼, 인간관계로부터 구속당하지 않고 초연하게 두려움 없이 놓아버릴 줄 알아야 한다. 법계의 법망은 욕망하면 할수록 채워지지 않고 고가 뒤따르게 되며 텅 비우고 던져 버리면 가벼워지고 떳떳하며 저절로 이뤄지는 이치가 있다. 윤회의 덫을 벗어나고 완전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자는 비우고 비워서 맑은 영성으로 홀로 깊은 내면의 즐거움으로 가득 채우는 데 있다.

자신의 계율에 엄격하고, 흔적 없는 보시와 인과를 달게 받으며 안으로 고요히 뭉치는 대정진 대적공의 긴 여정이 있어야 자신의 굳은 업과 습이 제거되고 무의식이 정화된다. 저 깊은 해저를 들어 올려 활화산으로 분출한 8천미터 상봉을 이룬 전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를 보라. 바다가 산이 되는 기적은 그럴만한 조건이 형성되어야 가능하다.

한 치밖에 안 되는 내 작은 적묵산방 안에서 오는 추위와 외로움을 벗 삼아 긴 터널을 지나 불멸의 생명력으로 서원의 꽃이 벙그는 새봄을 기다리자.

“참으로 영원한 나의 소유는 정법에 대한 서원과 그것을 수행한 마음의 힘이니, 서원과 마음공부에 끊임없는 공을 쌓아야 한없는 세상에 혜복의 주인공이 되나니라.” 〈대종경〉 천도품 17장.

12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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