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진자리 마른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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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진자리 마른자리
  • 조경원 편집장
  • 승인 2022.02.28 20:41
  • 호수 1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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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교무 수학 시절, 학교를 오갈 때 영모전(익산성지) 앞을 지나곤 했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 영모전 광장 잔디를 깎고 있는 한 선배 교무가 있었다. 검게 그은 얼굴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의 잔해가 묻어 볼품이 없었지만 지나가는 까까머리 후배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따뜻한 선배였다.

몇 해가 지나 난 교당의 교무가 됐고, 선배는 여전히 헤진 작업복을 입은 채 총부 한구석을 수리하고 있었다. 바쁘고 고된 총부 산업부원의 삶이지만 동아리를 만들었고, 거기에서 뜻을 모아 기금을 만들어 어려운 교당을 돕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새 난 군종장교가 됐지만, 선배는 기름 냄새 가득한 공업사로 발령이 났다. 달라진 거라곤 풀의 잔해가 폐유로 바뀌었을 뿐 마른자리가 아닌 진자리였다. 명절 때면 “밥은 잘 먹고 사냐”며 먼저 안부를 묻는 선배였다. 군복을 벗을 때는 자기 일처럼 아쉬워했다. 그때의 위로(慰勞)는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교단으로 복귀한 나는 밖의 변화를 관찰하며 책상에 앉아 글을 쓰지만, 선배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작업복 차림으로 있다. 그렇게 현장에서 교단 안팎의 세정을 살피고 있다. 가끔 마주치면 “고생이 많다”며 꾸러미를 건넨다. 그 속엔 선배가 후배에게 베푼 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게 선배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몸소 선행(先行)함으로써 후배에게 마른자리를 물려주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평생을 교화현장에서 살다 퇴임한 산타원 고현종 대봉도가 열반했다. 약력을 살펴보니 50년 봉직 기간 동안 한 번쯤은 마른자리에 가실 법도 한데, 늘 진자리에만 있었다. 옷을 기워 입으면서도 어려운 교당의 후진이 찾아오면 소리 없이 돕고, 아낌없이 주신 분이었다고 한다. 무아봉공의 담담한 수도인이자 한결같은 평상도인이었다. 이처럼 교단은 선진들의 헌신으로 일궜다.

후배로서 ‘이제는 선배 자신들도 챙기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말해도 진자리를 떠나지 않을 그들이지만 오랫동안 건강하게 파수공행(把手共行)하길 희망한다.

2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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