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초량교당 터 매입을 위한 천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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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초량교당 터 매입을 위한 천일기도
  • 조경원 편집장
  • 승인 2022.03.28 18:43
  • 호수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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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교당의 역사는 원기20년(1935)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20년부터 몇 차례에 걸쳐 초량초등학교와 초량 사립학교(중앙유치원)에서 일주일간 ‘불교혁신론’을 강연했는데, 수강생이 100여명이 넘을 정도로 법풍을 진작시켜 초량교당 설립의 정신적 기초가 됐다. 원기21년 30여명의 교도가 교당 창립발기인대회를 도모해 부산시 초량동 967번지 대지를 매입하고, 교당을 건축해 그해 8월 완공했다. 당시 교단 최초의 정녀인 김영신 교무가 초대교무로 부임해 법회를 열었다.

원기30년 광복을 몇 개월 앞두고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 사이에 주둔한 미군이 연락선을 격침하고 부산을 향해 함포사격을 한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총부까지 들렸다. 당시 총부에서는 부산의 교무들을 총부로 피신시키거나 순직하더라도 교당을 수호해야 한다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당시 총부는 일제의 황도불교화 정책에 압박을 받고 있던터라 종법사였던 정산종사는 ‘전시 하 지방교화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 정세를 살폈다. 이때 정산종사가 초량교당 법당에 ‘사은상생지(四恩相生地) 삼보정위소(三寶定位所)’라 써 붙이고 시국안정을 염원하며 기도를 올렸다. 이후 정산종사는 8월 15일 총부로 돌아오던 중 대전역에서 해방 소식을 들었다.

원기30년 광복 이후 초량교당 조전권 교무와 교도들이 해외로부터 귀국하는 동포들을 위해 구호사업을 전개해 그 공적으로 부산울산교구청의 전신인 부산시 신창동 1가의 땅을 인수하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 그리고 김영신 교무를 비롯해 역대 선진들의 행적이 남아있는 옛 초량교당 터 매입을 위해 이성만 초량교당 교무가 2월 20일부터 1천일 기도를 올리고 있다. 이 교무는 “소태산 대종사의 성혼과 정산종사의 기도 원력이 뭉쳐있는 옛 초량교당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천일기도에 재가출가 교도들의 관심과 동참을 부탁했다.

4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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