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서명(誓銘)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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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서명(誓銘)의 방
  • 조경원 편집장
  • 승인 2022.10.26 14:01
  • 호수 12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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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바티칸시국에 있는 바티칸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교황들이 수집한 소장품을 관람한 것은 큰 경험이자 충격이었다. 그곳은 르네상스 예술의 결정체이지만 동시에 세속화된 교회의 결정체였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은 어느 때보다 성직자로서 영적인 임무에 충실하고 교회를 개혁할 교황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고위성직자 직의 매매와 매수로 탄생한 교황은 교황직의 보편적 사명을 잃고 예술에 대한 심취와 문란한 생활을 반복하였다. 고대의 조각상과 웅장한 건축물, 그리고 후기 중세의 회화는 그들의 사치, 부패와 반목, 족벌주의의 증거품이었다.

사실 박물관을 방문한 이유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집무실 가운데 하나인 ‘서명의 방’을 보기 위해서였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의 집무실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쉬운 일인가. 더욱이 라파엘로가 사면의 벽에 신학, 법학, 철학, 예술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린 곳으로 알려진 곳이 아니던가. 방 가운데 서서 벽화를 바라보며 신앙(신학)과 정의(법학)와 본질(철학)과 아름다움(예술)을 기준 삼아 중요한 문서에 서명했을 교황을 상상했다. 풍전등화인 교회의 중대사를 여기에서 결정한 것이니 바티칸에 있는 1,400개의 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일지 모른다.

원불교 익산성지에는 원기22년부터 55년까지 사용한 종법실이 있다. 소태산 대종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는 방은 평상시 손님을 맞이하고 밤에는 숙소로 사용했는데, 행사 때는 대중이 운집한 규모에 따라 네 칸의 방을 터서 활용하는 등 대중과 소통하는 구조로 돼 있다.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운 여러 개의 방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는 교황의 집무실과는 확연히 다른 개방과 소통의 방이다. 짐작건대, 교단의 중대사를 정한 곳이었지만 특정한 사람들만 드나드는 특별한 장소가 아닌 범부까지도 드나드는 곳이지 않았을까 싶다. 결정을 내리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서명(書名)의 방’이 아니라 지도인으로서의 사명을 맹세하고 명심하는 ‘서명(誓銘)의 방’ 말이다. 훗날 익산성지가 바티칸처럼 세계인의 명소가 될 때, 종법실이 수많은 건물 가운데 가장 보고 싶은 곳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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