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화 100년을 향한 서울교구 교당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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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화 100년을 향한 서울교구 교당탐방
  • 한울안신문
  • 승인 2023.05.17 14:01
  • 호수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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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당 ①

 

«편집자 주»
서울 교화 100년을 앞둔 올해부터 내년까지의 일정으로 서울교구의 교당들이 어떻게 탄생되었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또, 연원교당은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온고이지신이라 옛것을 살피다 보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하고 준비할 수 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개인적으로도 서울 교화 100년을 살피다보면 창신동 터와 돈암동 비석까지는 알고 있으나 딱 거기까지인게 많이 아쉬웠다.
내년 서울 교화 100년을 앞두고 한울안신문에서는 서울교구내 서울에 있는 교당들의 연도별 탄생과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그 출발점은 소태산 대종사가 경성에 올라온 원기 9년 3월 30일부터 돈암동에 건립한 원불교 성적지 16호 까지로 하고 경성 즉 서울 교화에 대한 의의를 정리하면서  서울 교당 탐방 역사의 문을 열고자 한다.
교당탐방의 순서는 원기 11년 이후 시대적인 순서로 하여 서울교구 홈페이지와 서울 교당 93년사를 비롯하여 원불교 100년 총람을 참고하고 현존하는 교당을 탐방, 교당의 현주소를 기록하기로 한다.
내년 원기 109년 서울 교화 100년에 서울에 있는 교당들의 이야기도 함께 마무리되기를 염원하며 그 연재를 시작하고자 한다.

  1. 서울 교당의 설립배경 
원기 9년 3월 30일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역에 첫발을 내디디고 경성에서의 인연들을 규합하여 원기 11년(1926) 육타원 이동진화 선진의 희사로 창신동에 불법연구회 경성 출장소를 발족하게 됐다.
원기 18년까지 창신동 회관에서는 성주법문을 이공주와 성성원 선진에게 전하였으며 약자가 강자되는 법문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종경 불지품 19장 조선 박람회 이야기와 대종경 전망품 10장에 대한 설법을 하였다.
또한 임시 여자 수위단회를 구성했고 최초의 상장 예식 집례를 실시했다. 성성원, 김영신, 조전권과 은부시녀 결의식 및 일기법이 시행되었다,
원기 18년 11월에는 경성지부 창신동 회관이 회원의 증가로 협소해 어려움을 겪자 돈암동 낙산아래의 앵두나무골 580여평에 신축회관을 낙성하게 된다. 독립된 법당으로는 최초였고 일원상이 봉안되었다. 법당에 300명까지 수용가능했으며 교단이 규정하고 있는 건축법규 및 예법을 시행했다.
원기 21년에는 교리강습회를 열었다. 원기 28년에는 대종사님이 장남 광전과 상경, 19일간 머물며 ‘어린 제자들에게 내가 먼 수양길을 떠나면 어쩔것인가’하는 염려를 한 곳으로 알려져있다.
이후 서울교당은 원기30년 경성지부를 서울지부로 이름을 바꾸었고 송도성 교무가 처음으로 최초 대중 강연을 경성 방송국에서 방송 설교를 했다.
원기 31년에는 돈암동 회관을 매각하고 용광사( 현재의 서울 교당 자리)로 이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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