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선진, 주산종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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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선진, 주산종사 (12)
  • 한울안신문
  • 승인 2023.05.31 10:51
  • 호수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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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화100년을 앞두고 서울교화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산종사를 조명하며 젊은 청년의 기상으로 살아있는 주산종사를 기리며 삶과 일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 주산종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수필하신 법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실천하신 법력’이다…”라고 하신 주산종사 추모사업회 간행사 말씀처럼 “… 문집이 책장에만 꽃혀 있지 않고 모든 원불교인들이 푸른 청년의 기상으로 읽고, 이 세상의 아픔에 동참하는 지남으로 읽었으면 한다. 꼭 그래주길 바란다.”는 간행사 말에 눈길이 꽃혀 독자제위들과 함께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지면을 편집하고자 한다. 
이미 나와 있는 책이지만 <한울안신문>의 눈길에 따라 함께 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든 지면이니 색다른 일화를 기대하는 독자들은 혜량해 주시길 바라면서 연재를 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3. 주산 송도성 종사

1. 출가전기
선생은 본교 원기전 9년(1907년)11월 19일에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에서 성주 기유 명문의 후예인 부친 송벽조 선생과 모친 이운외 여사의 3남매 중 차남으로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고결정직하고 총명예지하여 문일지십하고 필법이 또한 절등하여 숨은 명필이었다. 
9세시에 서당에 취학하여 한문수학을 시작하였던바 불과 6년 내에 사서심경을 대강 통하였고 그 마음이 심히 고결청백하여 비열한 행동은 절대 금물이었나니 그 당시 서당 근처에는 일본인들이 가끔 놀러 오던 바 하루는 과자를 많이 가지고 와서 땅에다 던지면서 서당학동들에게 집어먹으라 하였다. 그 과자를 본 학동들은 그만 뛰어 나가 서로 다투어 가며 흙 묻은 과자를 던지는 대로 집어 먹는지라 그 꼴을 보고 섰던 선생은 어린 마음에도 일본인들이 학동들을 무시하고 개 취급하는 것 같으매 심히 분개하여 불쾌한 어조로 학동들을 향하여 ‘개가 아닌 이상 땅에 던져 흙 묻어 더러운 과자를 왜 집어 먹느냐’고 못 먹게 하였다. 
그런즉 일본인들은 서로 보고 무어라고 지껄이며 과자 한 봉지 를 손으로 들고 와서 직접 주며 먹으라 하였다. 
그러나 어린 선생은 눈도 거들떠보지 않고 물론 받지도 않았다. 그만 무안무색하여 다른 아이들에게 주고 가버렸다 한다. 
12, 13세 시절에는 가사조력으로 소풀을 뜯기기 위하여 소를 몰고 들에 나가면 소는 한편 냇가에 매어놓고 근방의 땅에 앉아 운필 익히느라고 일심이 되어 소 풀 뜯기는 것을 망각한 때가  실로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심중에 큰 뜻을 품고 여러 가지 공상도 많이 펴 보았으나 그 뜻을 펼 곳이 없어 주소일념 답답히 지내더니 15세시에 의외에도 전 가권(家眷)이 전남 영광으로 이사하게 되니 선생도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해가 바로 본교 원기 6년(신유)인데 형님 정산 종법사의 지도로 대종사님을 뵈옵고 법문을 받드니 즉석에서 대신심이 발하여 환희불승한 가운데 원위제자하는 동시에 수도하기로 서약을 올리었다. 
대종사께서는 연소한 선생의 서약을 기특히 여기시사 그 발심의 동기를 물으시니 선생이 대답하되 「부심자 지광지대물 수련정신 확충기지대지심이이」 (무릇 마음이란 지극히 넓고 지극히 큰 물건이니 정신을 수련하여 그 지극히 큰마음을 확충할 따름입니다.)라고 써서 올리고 그 후부터는 종종 대종사님께 내왕하며 청법낙도하게 되었다. 


6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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