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선진, 주산종사 (17) 3.주산 송도성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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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선진, 주산종사 (17) 3.주산 송도성 종사
  • 한울안신문
  • 승인 2023.07.19 15:19
  • 호수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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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식과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 탁월

 

Ⅲ. 언론·출판의 터를 닦아
원기 9년 이리 보광사에서 개최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후 익산총부 건설에 혈심혈성을 다하기 시작한 주산종사는 이때 서무부 서기에 임명되었고, 회관 건축시에는 공양주 노릇을 하였다. 
원기 10년 4월 26일, 정수위단 제 1차 보궐 및 대리 조직시 주산종사는 약관 19세의 나이로 이산 이순순(二山 李旬旬)대호법의 대리로 수위단원이 되었다. 원기 11년에는 경성출장소 초대 교무로 파견되어 1년간 서울교화의 기틀을 다졌으며, 원기 12년에는 다시 총부 서무부 서기로 봉직하였다. 
원기 13년에는 연구부 서기로 전임되어 교단 최초의 월간지인 『월말통신』을 간행하였다. 의로움에 찬 붓으로 날카로운 시대감각을 가지고 회중내의 상황보고와 현실에 적절한 대종사의 법설을 게재하여 공부 방향의 지침서로 삼게 했고, 회원들의 공부건 발표와 각지 예회상황을 기록하여 교단사의 중요한 사료가 되게 했다. 이러한 주산종사의 문화 활동과 매스컴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 교단의 『원광』, 『원불교신문』 발간을 비롯한 언론출판문화의 초석이 되었다. 
주산종사의 탁월한 언론의식과 사회현실 및 시사에 대한 관심은 수행품 20의 다음 법문만 미루어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송도성이 신문을 애독하여 신문을 받으면 보던 사무라도 그치고 읽으며, 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기사의 제목이라도 본 후에야 안심하고 사무에 착수하더니, 대종사 하루는 경계하시기를 “네가 소소한 신문 하나 보는  데에 그와 같이 정신을 빼앗기니 다른 일에도 혹 그러할까 근심되노라 (중략). 너는 마땅히 그 하고 싶은 데에도 끌리지 말고, 하기 싫은 데에도 끌리지 말고, 항상 정당한 도리만 밟아 행하여 능히 천만 경계를 응용하는 사람은 될지언정 천만경계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되지 말라.  그러하면,  영원히 너의 참되고 떳떳한 본성을 여의지 아니하리라.”」
비록 대종사님으로부터 수행적 측면에서의 경계는 받았으나 주산종사의 언론과 시사문제에 대한 높은 관심도는 후진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Ⅳ. 형제의 신성(信誠)
원기 14년 정식수위단원이 된 주산종사는 이듬해 교무부장의 중책을 맡아 『월말통신』을 발전시켜 『월보』를 간행했다. 이어 원기 17년에는 교무부장 겸 영광지부장으로 발령되어 한발과 폭염으로 인한 극심한 재해를 극복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어 원기 22년에는 교정원장에 피선되었고 교무부장과 감찰부장의 책임까지 겸하여 교단발전에 혼신의 정열을 다하였으며, 원기 24년에는 총부교감으로 전보되어 젊은 학원을 대상으로 상시학원을 개설, 인재양성을 전담했다.  
대종사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수운 최제우 선생과 증산 강일순 선생을 선지자(先知者)요 신인(神人)으로 받들게 했다. 변의품 32장에는 삼산 김기천 종사와 항산 이호춘 정사가 대종사님과 더불어 최수운·강증산 선생에 관해 문답한 것에 이어 주산종사가 대종사와 다시 문답한 내용이 나온다.  
「송도성이 다시 여쭙기를 “그 분들은 그만한 신인이온데 그 제자들로 인하와 세인의 논평이 한결같지 않사오니,  그 분들이 뒷세상에 어떻게 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일이 인증할 만한 이가 인증하면 그대로 되나니,  우리가 오늘에 이 말을 한 것도 우리 법이 드러나면 그 분들이 드러나는 것이며,  또는 그 분들은 미래 도인들을 많이 도왔으니 그 뒷 도인들은 먼젓 도인들을 많이 추존하리라.」  

 

 

7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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