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선진, 주산종사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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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선진, 주산종사 (20)
  • 한울안신문
  • 승인 2023.08.17 22:24
  • 호수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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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의 업적과 공덕

주산의 공덕
그는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배우지 못한 아쉬움을 가슴에 안고 스스로 정진하여 드디어 문리를 터득하였고, 소태산 문하에 입교하였다. 16세에 출가 시를 올리고 전무출신한 뒤로 소태산 곁에서 평생을 교단의 기초를 닦는데 바쳤다. 그러므로 그가 교단에 남긴 공덕은 세월이 흐를수록 빛나고 클 것이다. 이에 그 공덕을 몇 가지로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는 평생토록 소태산을 곁에서 신봉하며 보필하였다는 점이다. 소태산은 그가 법기임을 인정하였고 그는 보필 성자로서 천출지인 즉 하늘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살아있는 경전이라 할 정도로 소태산의 가르침을 따라 교법의 모범이 되고 실증적 도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최선의 보필 공덕을 쌓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교단 창립의 기초를 닦은 공덕이다. 그는 18세 서무부 서기로부터 시작하여 주요 요직을 맡아 교단 창립의 기틀을 다졌다. 
셋째는 영광, 서울 등에서 교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경성출장소 초대 교무와 영광지부 교무부장 교감 지부장으로 있으면서 교화하였고, 특히 해방이후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전개하여 교단의 활약상을 널리 알리고, 김구, 조소앙, 여운영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온 많은 주요 인물들과 교류를 통하여 교단의 위상과 역할을 발휘하였다. 
넷째는 공부인의 사표가 되고 전무출신의 표준이 되었던 공덕이다. 
그는 22세 창립 제1대 1회 기념대회에서 정식 특등급에 승급하였고, 1954년 제1대 성업봉찬대회에서 정식 종사위로 추존되었으며, 1991년 소태산 대종사 탄생백주년 기념대회에서 정식 대각여래위로 추존되었다. 
비록 몸은 공가에 처해 있으면서도, 처자식에 대한 도리를 법도있게 하였으며, 부모에게는 효도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전무출신의 표준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다섯째는 교서의 기초를 마련하고 법문 기록을 남긴 공덕이다. 
정전 편수위원 등으로 참여하여 직접 교서 제작에 공을 쌓기도 하였지만 소태산의 법문을 기록하여 후에 경전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언급되었다. 
여섯째 교육 기관 설립 추진 및 후진 양성의 공덕이다. 
그는 영산에 있을 때나 총부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청년들과 어린이들을 격려하고 사랑하였으며, 늘 교육을 강조하고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교육을 실시하여 가르쳤고, 교단의 인재양성을 위하여 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열반에 들었던 것이다. 그는 교단 미래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인재 양성을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일곱째 전재동포구호사업 활동과 순교의 정신을 보여준 공덕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서울, 부산, 이리 등지에서 모든 연락과 사무 절차를 주산이 직접 경성과 이리를 왕래하면서 구호사업을 늘 격려하였다. 
1945년 9월 10일부터 1946년 3월 31일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6개월 20일간 계속 구호사업을 하였다. 그는 전재동포구호사업 뿐만 아니라 그 후속 기관으로 고아원 설립 문제 등 사회 자선사업에 깊은 관심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아울러 민족정신 양양 고취의 일환으로 한글 보급운동을 전개하여 문맹퇴치에도 주력하였다. 그는 교화와 자선과 교육을 둘로 보지 않았다.  

 

8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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