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선진, 주산종사 (37) Ⅲ. 주산종사 유묵이 교단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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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선진, 주산종사 (37) Ⅲ. 주산종사 유묵이 교단에 미친 영향
  • 한울안신문
  • 승인 2024.01.17 18:46
  • 호수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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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종사는 후학의 교육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원기 27년 5월 26일 이공전군에게 답서하기를, 
「나 같은 사람은 헛되이 반생을 넘겨 가히 한 가지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고 오직 믿는 것은 그대들 청소년층뿐이라 마음에 새기고 뜻을 두어 잡으며 큰 광채를 내도록 잘 연마하여 뒷날에 불법의 동량이 되기를 부탁하노라.」 라고 하여 젊은 후진들에게 겸허한 마음으로 뒷날 큰 광채를 내어 불법의 동량이 되도록 당부하셨다. 
송인걸 교무는 그의 저서에서 주산종사는, 「작은 키에 위용과 정열이 넘치는 얼굴, 그리고 따듯한 인간애를 지닌 주산종사는 각 종교의 경서에 통달하는 지혜와 신구학문을 이해하는 지식에 이르기까지 걸리고 막히는 바가 없었고, 신문 잡지 문학서적을 보고 아는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붓글씨와 달마상 그리기에 일가를 이루고 문장에도 능하여 초기교단 간행물에 많은 글을 남겼다. 진보주의자로서 패기에 넘친 지도자요,  자기수행에 철저했던 주산종사는 특히 청년지도와 후진양성에 열과 성을 다했으며 원기 31년 4월 그의 유지를 받들어 발족된 <금강청년단>은 뒷날 <원불교청년회>의 모체가 되었다.」 라고 밝혀 주산종사의 청년상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산종사의 유지를 받들어 공산 최정균(1924~2000>은 「임의 뒤 따르리」 추모글에서, 
「색신은 인연따라 돌아가셨으나 뚜렷한 공심지행 필법 남았으니 이 몸 다는 못 따르더라도 기어이 받아서 따르고 또 따르오리다」 라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주산종사의 필법에 흠모되어 서·화에 정진하였다. 뒷날 대한민국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 등으로 중앙에서 크게 활동하셨으며, 만년에는 최초로 원광대학교에 서예학과를 창설하여 젊은 서예인을 양성하였고, 배출된 졸업생들은 실기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서예계에 촉매제 역할을 하며 새로운 반향을 이끌어 내고 있다. 
공산은 작게는 대한민국 크게는 중국과 일본에서의 대학 서예를 이끌어 내었고,  삼국의 교류를 통해 서예술의 깊이와 폭을 확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데 공산의 근저에 주산종사의 종지가 분명히 내재되어 있었고, 그 흠모하는 바로부터 비롯한 것이므로 결국 주산종사의 종지가 종교 뿐만 아니라 서예술에도 크게 기여하게 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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