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화선
상태바
취화선
  • 전재만
  • 승인 2002.06.08 0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섣불리 말하기가 두렵다. 임권택 감독은 한국 영화사의 맥을 만들어 왔고 최근 만들어온 영화는 재미로써의 영화가 아니고 마치 한국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해내고 세계에 펼치려는 전도사같다.
절세의 예술가가 각고의 노력과 혼신을 담아 한 장면 한 장
면 만들어낸 것 같은 힘과 기백, 당당함이 가득차 있다.
취화선을 보면, 장승업이라는 인물 보다는 임권택이라는 인물
이 먼저 떠오른다. 임권택 감독은 왜 장승업을 그릴려고 했을
까?
장승업은 조선말기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선비들이 즐기는
문인화에서부터 서민들이 즐기는 풍속화나 민속화, 모든 분야
에서 대가를 이루었고 이후 모든 훌륭한 화가들은 장승업에
게서 키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취화선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장승업을 알기는 어렵다.
장승업의 대표적인 그림이 타이틀로 걸리는 것도 아니고 영
화에서 최민식이 그리는 그림이 장승업의 그림을 모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훌륭한 동양화를 모사한 것인지 알 수
가 없다.
설사 장승업의 그림이 훌륭했다고 해도(인간의 영혼을 흔들
만큼), 그 내용은 등장인물들이 거드는 대사를 통해서 뿐이다.
‘대단하다’, ‘훌륭하다’, ‘신통하다’, ‘조선제일의 화
가다’.
장승업의 예술혼은 임권택 감독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포스터
를 통해서, 곳곳의 아름다운 영상을 통해서, 장승업보다 임권
택 감독의 영상미가 대단하고 훌륭하다는 것에 탄복을 자아
내게 된다.
장승업의 성장과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대목은 이태리 축
구선수들의 결정적이고 빠른 슛처럼 찬사를 자아낸다.
거기다 평범한 인물들의 등장이나 묘사도 보통 화면이 아니
다. 대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압축과 미묘한 각도로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 계속된다.
최민식의 연기도 돋보인다. 백치미가 전보다 더해 바보처럼
웃는 순박한 웃음이나, 인생의 경험이 농익은 듯한 말년 연기
가 신기하다. 어떻게 저런 풍부한 표정과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지.
누구나 그럴 것이다. 영화관을 나오면 최소한 몇일간은 불시
에 장면 장면의 아름다움이 잠재의식을 꽉 짓누르는 듯한 느
낌. 완숙함과 빼어난 경지를 이룩한 임권택 감독.
그러나 이상하게 허전하다. 시간이 지날 수록 영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깊은 맛이 서려 있는데 허전하다.
취화선에는 장승업이 없다. 취화선에서 장승업을 찾을 수가
없다. 장승업을 보는 사람들과 장승업을 그리는 사람들만 있
다.
장승업은 누구인가?
취화선에 꼭 장승업이 나와야 하는가? 장승업이 없더라도 임
권택 감독이 있지 않은가?
춘향젼에는 춘향이도 나오고 이도령도 나오는데, 서편제에서
는 눈 먼, 송화도 나와 열연을 하는데, 왜 취화선에는 장승업
이 없을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가 장승업이다. 장승업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장승업의 고민을 보면서 자신의 고민
을 해결할 영감을 얻는다. 장승업이 잘되면 사람들도 기쁘고
장승업이 안되면 사람들도 안타깝다.
그러나 취화선의 장승업은 ‘극기(克己)’주의자 같다. ‘하
면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 왜 해야 되는지, 거듭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보이지 않고 또 여자를 찾아가고 술을 마신
다.
장승업은 마치 큰 깨달음이라도 얻을 듯이 몸부림치는데 그
냥 몸부림만 계속 친다.
결국 임권택 감독은 장승업을 불화덕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장승업이란 사람은 더욱 수수께끼로 사라진다. 임권택 감독만
남긴체.
아쉬움이 너무 크다.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처럼 취화선은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임권택 감독의 역량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장승업을 형
상화하지 못한 각본이 더 강렬하게 떠나질 않는다. 어떻게 이
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취화선은 임권택감독에게 깐느 감독상을 안겨주었다. 이제 한
국에도 세계 최고의 영화를 만들 문화적 힘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놓친다면, 이 시대의
삶을 놓친다면 참 안될 일이다.
<박동욱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