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상태바
영화이야기
  • 한울안신문
  • 승인 2002.09.29 04: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 영화이야기 >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소녀의 재림’은 마치 일본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보다 더 풍부한 상상력, ‘매트릭스’보다 더 깊은 깨달음과 화려한 액션, 스타크레프트 보다 더 재미있는 게임, 그리고 구세대와 신세대가 한 자리에서 소통하게 하려는 듯 도전과 모험정신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이런 도전과 모험, 새로운 시도 가운데에서도 결코 타협함이 없이 비타협적으로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싸우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물질의 노예화’다. ‘성냥팔이 소녀’가 동화로 회자되던 시대부터, 산업사회, 정보사회, 지식사회, 가상공간이 엄연히 사회형태를 갖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체제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있다. 체제의 지배세력이 그 욕심을 유지시키기 위해 ‘노예로 즐겁게 살아가는 기쁨’을 예술이나 문화 형태로 만들고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향유하게 만든다.
장선우 감독은 ‘물질의 즐거운 노예생활’을 유지시키는 체제를 과거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본다. 그리고 단지 그것은 ‘동화’가 아닌 ‘게임’이란 형식으로 등장하면서, 장선우 감독은 동화의 본질을 드러낸다. 반드시 소녀가 ‘라이타’(현대에서는 성냥이 라이타로 변했다)를 팔지 못하고 얼어 죽어야 함. 그리고 죽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죽는데, 그때 그 사랑하는 사람으로 떠올려지면 게임에서 이기게 된다.
그러나 소녀는 주인공 ‘주’에 의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소녀는 세상의 냉혹함, 물질문명의 노예로 살아가는 체제를 거부하게 된다. 공장에서 노동력을 강제하는 로봇을 향해 총을 쏘고, 인정을 잃어버리고 물질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냉혹한 사람들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게임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물질문명을 상징한다. 그래서 주인공 ‘주’와 체제 유지자는 한판 전쟁을 벌이게 된다. (체제 유지자 보다는 도그마, 권력의 중심자들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 모두가 노예화되어 있는 시스템,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고 더 크게는 삶의 문화, 문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놀라운 것은 이점을 장선우 감독이 발견하고 콕 집어 내서 대상화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노예’의 본질을 생산양식에서, 놀이에서, 인간의 도덕성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밝혀낸다.) 장선우 감독은 그러나 이 영화 역시 또 하나의 게임이나 물질의 노예화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간 중간 영화의 리듬을 깨면서까지 ‘자신의 영화 역시 허구임을 지적한다.
무릇 형상 있는 바가 다 이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장선우 감독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금강경의 문구를 아예 영화전면에 걸어놓고 화두풀기에 들어간다. 소녀는 ‘주’로 인해 게임이 아닌 생명체로 살아나고 ‘성냥팔이 소녀’의 운명을 벗어나 성불(成佛)의 문에 들어선다. 그러면 무엇이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성불에 들어서는 것이고 여래란 무엇일까? 이점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영화 형식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등어’라는 무기라든지, 시공을 넘나드는 전투장면은 분별의 세계를 넘어선 것이다.
남녀노소의 단절을 소통시키면서 변화된 시대와 그 안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생길을 장선우 감독은 끈질기게 찾아 나선다. 가벼움과 무거움이, 드라마와 공허함이 조화를 이루며 펼쳐질 수 있다는게 신기하다.
장선우감독의 모험정신과 개벽의 열정에 절로 찬탄이 나온다.
<박동욱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