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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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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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5.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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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타원 홍원정 교무 " 대치교당
몇 해 전, 인도에서의 일이다.
한 명상그룹에 들어가 그들의 명상을 공부(?)하고 있던 때인데 그룹 스터디 과정 중 그 날은 전 그룹원들 앞에서 지도자의 개별 체크와 함께 소정의 치유작업이 있는 시간이었다.
기다리던 내 차례가 돌아와서 난 앞으로 나아가 그 지도자의 앞에 섰다.
그는 날 맞이해서 하는 말이 “당신은 그 동안 항상 어머니의 자리에서만 있었군요. 그러니 그들의 슬픔과 고뇌는 당신이 받아주고 위로해 주었을텐데, 그러면 당신의 그것은 누구에게 기대어 풀 수 있었겠오, 그러니 지금 이 시간 당신은 나에게 기대어 당신의 슬픔을 위로받아도 됩니다.” 하고는 날 포옹해 주는데, 난 그 짧은 순간 속으로 “어쩌면 이렇게도 나를 잘 읽어낼 수 있을까? 정말 귀신같구나.” 생각하면서 얼떨결에 그 분을 안고서 그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그랬더니 다시 그 분이 하는 말,
“이 사람을 봐라. 지금은 자기의 슬픔을 내어놓고 실컷 울기도 하고, 충분히 위로를 받으라고 안아주었더니 오히려 자기가 내 등을 토닥여주고 있지 않는가?” 하니까 그 실내에 있던 우리 그룹원들은 다같이 “와!” 하고 웃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실내에 꽉 찬 그 웃음소리 속에서 다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고, 나도 그들과 함께 웃어버릴 수 밖에는 없었다.
그렇다. 난 독신수도자이면서 여성교역자의 젊은 몸으로 처음 오지인 교화 개척지에 혼자서 발을 디디면서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자리에 날 앉히고 모든 이들의 어미된 심정으로 교화를 했었다. 그러니까 자연히 남녀노소 간에 잘 하는 것은 기특해 보이고, 부족하고 잘못 하는 것을 보면 “이 분들이 아직 뭘 아시겠어, 아직 초창기 교도님들인데…” 하고는 그들을 탓하거나 야속해 하질 않고 오직 많은 자식들 혼자 키우는 홀어미 심정으로 살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언제나 그들의 보호자요, 양육자이기만 했던가? 아니다. 뭐라고 해도 난 애 한 번 낳아 보지도, 키워보지도 않은 어린애(옛말 처럼)이면서 거기다 나만의 고집과 아집의 독선이 플러스 된 철 안 들고 덜 되 먹은 사람 아니던가?
그런 나를 그들은 힘겨운 현실 속에서 직접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으로써 때론 날 놀라게 하고, 때론 날 감탄케 하고, 때론 날 감동케 하면서 음으로 양으로 날 키워주고 성숙시켜 주었었다. 그러기에 그들이 더 없이 감사하고 소중할 뿐인 내 식구요, 내 가족인 것이었다.
그 후 시간이 많이도 흘러서 그동안 나는 지방의 교구청 교당을 거치고, 수도인 서울에 와서 지금도 역시 교화 현장인 이곳에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후로 내면의 많은 변화를 겪으며 달라졌다. 물론 교화하는 스타일도, 내 자신 공부하고 또 공부시키는 색깔도 달라졌지만 무엇보다도 그 때의 ‘나’가 지금의 ‘나’가 아닌 것만큼 달라졌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그들은 여전히 날 놀라게 하고, 감탄케 하고, 감동케 하면서 음으로 양으로 키워주고 계시고, 난 그들의 어미된 심정으로 살아간다.
다만 항상 죄스러운 것은 못나디 못난 어미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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