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원덕회장 김호영 대호법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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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원덕회장 김호영 대호법 인터뷰
  • 노태형
  • 승인 2006.07.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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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금은 대종사의 개혁정신이 필요한 때


“전문성을 가진 재가교도들의 역량이 교단발전에 다양하게 활용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단이 고루 발전한다.” 서울교구 원덕회장만 올해로 6년째 맡고있는 김호영 대호법의 ‘재가교도 역할’에 대한 바람은 한결같다. 전문성을 가진 인재들이 교단 밖에서 방관만 하고 있을 때 가장 속이 탄다는 듯, 그는 “사회적 안목을 가진 인재들이 교단에 적극 참여할 때, 보다 개혁적인 시대정신을 창출 할 수 있기 때문이다”며 분명한 소신을 밝힌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출가 중심의 교단이 재가들에게도 폭넓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밝히는데도 주저함이 없다. “사실, 대종사님 당대에는 출가와 재가가 고루 교단에 참여해 공부하고 일하지 않았는가?” # 교단 일을 내 일처럼 재가교도의 역할에 대한 그의 줄기찬 문제제기(?)는 평생을 국회사무처 직원으로 봉직하면서 교단의 크고 작은 일에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이리라. 국회 수석 전문위원(차관보급)으로 1999년에 정년퇴임한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최근에 교단의 숙원사업으로 이뤄진 군종문제. 오랜 국회사무처 경력으로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그는 좌산종법사의 유시가 떨어지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국회의장, 국방위원장 등을 만나 설득하는 한편 법개정에 필요한 준비작업에 세월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그는 “군종문제 해결에 기여했다”는 짧은 말로 자랑을 대신했다. 그가 국회에 있을 당시 교단의 부름에 관계할 수밖에 없었던 일은 이외에도 영모묘원, 완도훈련원, 배내골훈련원, 서울회관 등등.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난 참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교단이 필요로 할 때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아마 법신불 사은님께서 나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그러지 않았나 싶다.” # 대종사님 품에 안겨 해맑은 어린아이의 미소를 아직도 간직한 그는 태어날 때부터 원불교를 숙명처럼 믿고 자라난 아이였다. “갓난아기 때, 용신교당을 찾은 대종사님이 나를 품안에 안고 좋아했다는 말을 부모님에게 들었다”고 자랑하는 그는 “이것이 아마 큰 힘이 되어 일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그 동안의 이력을 죽 늘어놓기도. 원불교 전국 학생회장, 청년회 서울회장, 청운회 서울회장 등등. 또 대학교 때는 야학에 참여하면서 순교임무를 맡기도 했다. 특히 청년회 출범의 주역이기도 했던 그는 당시를 회상하듯 잠시 말을 멈춘 후, “당시는 청년활동이 참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행사에 가보면 지도 교무님들만 많은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또 하나 더 그가 아쉬워하는 것은 법훈을 받은 재가교도들의 공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문동현, 나철중, 오철환, 조대진 대호법 등등 공덕자들의 이름을 줄줄 늘어놓던 그는 “이런 분들의 공덕이 제대로 드러나야 그 자녀들도 원불교에 호감적일 수 있다”고 충고하기도. “앞으로 상 떼는 공부와 좋은 습성을 기르는데 많은 정성을 기울일 것이다. 그런데 이게 잘 안된다”며 특유의 천진한(?) 웃음을 머금는 그가 들려주는 마지막 말. “대산종사님이 원평에 계실 때 찾아가면 ‘너는 교단의 주인이 되라’며 자식처럼 격려해 주셨다. 이 힘으로 교단일을 할 수 있었다. 난 대종사님과 대산종사님의 홍복을 입은 사람이다.”? 노태형 편집장 lst21@w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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