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과 인식-김정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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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과 인식-김정탁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7.0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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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음의 차이,마음작용 중시


옛날부터 동해안에는 풍광 좋기로 이름난 곳이 여덟 군데 있습니다. 이름 하여 관동팔경이라고 하지요. 그 중에서도 강릉 경포대가 으뜸일 것입니다. 경포대는 호수변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워져 있지만 넓은 호수와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호수에 비친 달의 운치와 바다 위로 떠오르는 일출의 장관을 함께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입니다. 경포호, 또는 경호(鏡湖)라고 불리는 이곳은 그 이름조차 거울처럼 맑아서 풍류 좋아하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예찬의 글을 써놓고 가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경포대에는 한꺼번에 다섯 개의 달이 동시에 뜬다고 합니다. 밤하늘의 달, 바다의 달, 호수의 달, 술잔의 달, 그리고 내 님 눈 속의 달이 그것입니다. 물론 밤하늘의 달만이 실제 달의 모습이고, 나머지는 비친 달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비친 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서로 달리 보입니다. 예를 들어 내 님이 사랑스러우면 눈 속의 달은 아름다워 보일 것이고, 바다에 파도가 일면 거기에 비추인 달은 출렁거려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마음에 비친 달은 어떤 달일까요? 잔잔한 호수의 달처럼 맑고 밝은 달일까요, 아니면 파도에 씻겨 이지러진 모습을 한 달일까요? 사람들은 항상 맑고 밝은 달을 마음에 품으려고 하지만 우리들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자주 흔들려서 이지러진 달을 그릴 때가 훨씬 많지요. 이렇게 이지러진 달은 소위 경계(境界) 때문에 생겨난 달이고, 밝고 맑은 달은 자성의 정(定)을 세운 후에 나타난 달이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들 마음에 그려지는 대상은 밤 하늘에 떠 있는 달만은 결코 아니지요. 감각기관을 거쳐 인식하는 모든 대상들은 우리들 마음의 스크린에 모두 영상화 되고 맙니다. 친한 사람은밝게 스크린 되는가 하면, 소원한 사람은 어둡게 스크린 됩니다. 또 소나무는 지조의 표상으로 스크린 되는가 하면 대나무는 유연함의 표상으로 스크린 됩니다. 마치 호수에 비친 달처럼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대상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들 경계심에 따라 한없이 출렁거립니다.


그렇다면 호수란 우리들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비유이네요. 호수에 비친 달을 보면서 우리들 마음상태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마음이 흔들리면 달도 흔들릴 것이고, 우리들 마음이 고요하면 달도 고정되겠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혜능(慧能) 선사의 말씀이 문득 떠오릅니다. 휘날리는 절의 깃발을 보고 바람이 움직인다는 의견과 깃발이 움직인다는 의견으로 나뉘자, 선사는 우리들 마음이 움직인다고 하면서 논쟁을 잠재운 적이 있지요. 이는 ‘모든 것이 우리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유식론(唯識論)이 서양의 인식론(認識論)보다 앞서 가는 사유방식임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서양인들은 눈앞에 펼쳐진 외계의 모든 현상은 자기의 마음을 떠나서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오래 동안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감각기관으로 느끼는 것만을 학문적 대상으로 삼아 이로부터 모든 존재를 파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色·受·想·行·識(색·수·상·행·식)에 있어서 色만을 강조하고 受·想·行·識을 소홀히 한 셈이지요. 실제로 서양 철학에 있어서 인식론은 이런 전제 하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불가의 유식론은 色·受·想·行·識 중 어느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모두를 똑같이 중시한 사유방식입니다. 어쩌면 감각작용의 色보다 마음작용의 受·想·行·識을 네 단계로 구체화함으로써 감각작용보다 마음작용을 더 중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작용에 있어서 ‘受’는 느낌, ‘想’은 상념, ‘行’은 충동이나 의지, ‘識’은 관념에 각각 해당하는데 예를 들어 누군가를 괴롭다고 느끼면, 힘들다는 상념이 생겨나고, 나아가 미워하는 충동이 생겨나면서 마지막으로 僞·惡·醜(위·악·추)라는 관념이 우리들 마음속에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僞·惡·醜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누군가 나를 섭섭하게 하면 금방 토라지다가도 나를 치켜세우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를 환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치 경포 호숫가에 비친 달처럼 우리들 마음은 하루 밤에도 수없이 변화합니다. 이처럼 불가의 유식론은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속에 떠 있는 달, 아니 경포 호수에 떠 있는 달을 두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밤 하늘에 떠 있는 ‘객관적(사실적) 달’이 인식의 대상이라면 우리들 마음속에 떠 있는 ‘주관적 달’은 유식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유식론은 인식론에 비해 더 깊은 사유를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 마음공부와 관련해선 유식론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유식적 사유가 우리들 마음속에 제대로 자리 잡으면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달보다 우리들 마음? 속을 환하게 비출 것입니다. 성균관대 / 원남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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