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선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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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선교란?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10.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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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음으로 만나는 유럽 이야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분당 샘물교회 아프가니스탄 선교단이 두 명의 희생자(박은조 담임목사는 순교자라 표현 함)를 내고 돌아왔다.


그나마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몰라도 더 큰 희생을 내지 않고 그들을 위험지역에 못 가게 말린 국가를 상대로 사탄이라며 항의하며 재판을 청구해 가야했던 그곳에서 그들은 우리들에게 신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결론은 잘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공화국이라 할 수 있는 유럽은 선포적 선교를 접은 지 오래되었다.


선교를 위해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 자신들의 삶을 바꾼 것이라 느껴지며, 아직도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웃종교와 함께 살려는 상생의 씨가 싹이 조금씩 움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라는 작가가 지은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 말미엔 윌리엄 수도사가 제자 아드소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자를 경계하라” 이 교훈의 말이 독일이란 땅에 현지인을 교화하러 온 일종의 선교사라 할 수 있는 나에게도 강하게 전해져 온다.


왜냐하면 이 작가는 지식을 진리로 착각하여 믿는 것은 심각한 오류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자를 경계하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 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닐 때 원불교는 순교자가 없다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했던 적이 있다. 소태산은 아홉 제자들로 하여금 사무여한으로 기도하게 하셨지만 죽게 하시지는 않으신, 그래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란 개교동기로 새로운 종교를 펴셨고,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종교인의 구도적 삶의 모습임을 나에게 알게 해 주셨다. 유럽에서 종교만큼 정치적인 집단도 없다. 이슬람권은 신정일치이므로 더 말할 필요가 없고, 한국도 그 예외는 아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는 기독교민주당, 기독교사회당 등의 명칭을 가진 정당들이 있다. 한때 국교로 기득권을 가졌던 종교가 자신들의 이권을 놓지 않겠다는 욕심과 아울러 정치를 선교의 재물로 삼은 대표적 행태라 할 수 있다.


광신자가 아니더라도 신실한 기독교인들에게 선교란 사명감임과 동시에 일종의 강박관념이란 생각도 든다. 사명감에 불타는 그들이 마음에 새기고 있는 대표적 성경경구는 다음 두 가지이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들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복음28장 18~20절)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후서 4장 1~2절)


기독인들에게는 예수의 최후의 명령이며, 바울에 의해 다시 승인된 선교명령을 외면하기는 어려웠으리라. 그러나 마태복음 끝부분에 첨부된 구절은 예수에 의해 직접 선포된 말씀이 아니라 예수 사후(그들 용어로는 부활 후) 백여 년이 지나 교회가 조직화되고 권력체로 자라기 시작한 시대의 첨가구절이며, 디모데서 역시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 바울의 이론을 따르는 제자들(그들은 자신의 글을 바울에게 헌정하다 못해, 바울의 저작이라 주장하고 있음)이 교회 확장을 주장하기 위한 당위성을 알리는 주장일 뿐임을 유럽의 신학자와 종교학자, 그리고 신자들도 알고 있다.


경전에 있으므로 무조건 행해야 한다는 것은 강박관념의 지식이지 진리가 아니란다. 진정한 선교란 교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며, 그냥 이웃들의 삶의 자리가 좋아지도록, 혹은 회복되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교단에서는 종사위와 항마위 도인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 참으로 경사스런 일이다. 그러나 그분들이 진리적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 밖의 행을 이웃에게, 도반들에게 한다면 그 자체가 반선교적이며 반교화적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필요에 따라 그런 도인도 그런 위에 적을 두게 되는 것을 볼 때, 종교가 초창 때 행해지던 정신은 척박해지고 껍질을 진리로 착각하는 모습이 남의 일만은 아닌 것 같아 옷매무세를 가다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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