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와 소치기의 거리 재기
상태바
양치기와 소치기의 거리 재기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11.01 0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이경식 교도의 신화 속의 종교 8

지난번 글에서 “붕어빵에 붕어 없듯이 신화에 신은 없고 오직 인간의 욕망과 상상력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만, 신화 속에는 사람의 욕망과 상상력이 빚어낸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신화적 동물입니다.


# 이상한 동물들의 사파리


이들 동물은 대체로 두 가지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는 소나 말처럼 실재하는 동물이요, 또 하나는 용이나 봉황처럼 초자연적인 상상의 동물입니다.


앞의 것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으로 보는 동물과, 일상에서 볼 수 없는 신령스런 동물입니다. 그러니까 말(馬)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우리가 일상 보는 말이 있는가 하면 신라의 천마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초월적 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상상의 동물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할 만합니다. 예컨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가소스처럼 실재하는 말에다 날개만 달아 변형시키는 경우가 있고, 물고기 하반신에 여자의 상반신을 조합한 모습의 인어처럼 실재하는 동물(사람 포함) 두어 가지를 합성하여 만든 경우가 있습니다. 합성 얘기라면 동서양을 통틀어 용이 으뜸일 듯합니다. 아홉 가지의 합성이라니까요.


「머리는 낙타 같고 뿔은 사슴 같고 눈은 토끼 같고 귀는 소와 같으며, 목은 뱀과 같고 배는 큰조개 같고 비늘은 잉어 같고 발톱은 매와 같고 발바닥은 범과 같다.」


신화 동물에는 포유류나 조류, 파충류, 어류, 양서류에 영장류도 있습니다. 서양 신화 얘기입니다만, 독수리 머리와 날개에 사자의 몸통과 뒷다리를 가져서 날짐승도 길짐승도 아닌 그리핀 같은 것도 있고, 말의 몸통에 사람의 상반신을 붙인 켄타우로스 같은 반인반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해괴한 것도 많지요. 괴기 취미의 그리스 사람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뱀으로 되어 있고 쳐다보는 사람을 돌로 만들어버린다는, 날개 달린 여자 괴물 메두사를 만들었고, 뻥이 심한 중국 사람은 날개 길이가 삼천리나 되고 한 번에 구만리를 날아간다는 붕새를 만들어냈습니다. 자, 그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이런 황당한 동물들은 왜 신화 속에 나오는가? 단지 재미 삼아 만든 경우나 토템으로 쓰인 경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기능 한 가운데는 종교의 불변 명제라 할 제재초복(除災招福)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만합니다.


옛날 한옥 대문에는 좌우로 ‘호축삼재(虎逐三災) 용수오복(龍輸五福)’과 같은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삼재를 물리치고 용이 오복을 실어 오라는 기원입니다. 이와 같이 신화 속에 나오는 동물 중에는 재앙을 막아주거나 복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는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종교의 판짜기를 주도하는 동물들


그런데 고등종교의 경전에 나오는 신화적 소품들은 비유나 상징으로만 쓰이는 경우도 종종 있답니다. 기독교의 올리브나 뱀, 불교의 연꽃이나 사자 같은 것이 그런 경우겠지요.


기독교와 불교의 종교적 성격을 가르는 상징적 동물이 저는 양과 소라고 봅니다. 기독교에서 쓰는 목사, 목자, 목회 같은 말의 ‘목(牧)’은 짐승을 ‘친다 ? 기른다’는 뜻이고, 그때의 짐승은 양입니다. 그러니까 목양(牧羊)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목우(牧牛)입니다. 목우도, 목우십도송이 그렇고, 보조국사의 호 목우자가 그렇습니다. 여기서 목양과 목우, 양치기와 소치기를 놓고 기독교 발상지인 유대나라에선 양을 쳤고 불교발상지인 인도에선 소를 쳤으니 양과 소의 비유로 갈라졌다고 본다면 이건 곤란합니다.


양떼를 일방적으로 몰고 다니는 기독교가 집단적 신앙으로 나아갈 소지가 많다면, 잃어버린 소를 찾아다가 길을 들이는 불교는 개인적 수행으로 나아갈 개연성이 높다는 것쯤은 알아야 합니다. 새벽기도에 수천 명이 나와서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며 통성기도 하는 대형교회의 풍경과, 고요한 산사의 법당에서 선승들이 가부좌한 채 미동도 않고 자아의 내적 성찰에 침잠하는 풍경 사이의 거리를 짐작하시겠습니까? 양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이요, 소는 중생의 마음이며 성품자리입니다. 타력신앙과 자력수행의 갈림길입니다.


원불교에서 소태산 대종사도 소를 비유로 썼습니다. <회보> 42호에 실린 <입선공부는 소 길들이기와 같다>는 법설이 그 백미입니다. 송아지를 길들여서 고분고분하고 일 잘하는 소로 만드는 것과 같이, 사람도 도가에 들어와서 공부를 잘하고 훈련을 받아 마음을 바로잡음으로써 언행이 반듯하고 세상에 유익한 인재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양은 목자를 절대 믿고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약속받습니다. 불교에선 잃은 소를 찾아내어 길을 들이듯이, 자성을 찾고 욕망을 잠재워 해탈을 추구합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기독교와 같은 수동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진리적 종교의 신앙을 강조하는 한편, 불교와 같이 해탈을 통해 개인적 안심입명에 그치지 말고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통하여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하는 대승적 실천인이 되라고 합니다. 서울문인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