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도 사참과 이참 병행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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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도 사참과 이참 병행돼야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12.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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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정탁 교수의 세상읽기

교전을 읽다보면 “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참회문에 나오는 ‘마음공부를 하는데 삼독(三毒)을 제거해야….’라는 글입니다. 삼독이란 貪(탐: 탐냄)·瞋(진: 성냄)·痴(치: 어리석음)를 의미하는데 이 개념은 불교 경전에도 자주 등장하지요. 그렇지만 대종사의 뛰어남은 이것들을 제거하는 쉬운 방법을 제시했다는 사실이라고 봅니다.


대종사는 작은 잘못에 대해 참회하는 것은 큰 솥에서 펄펄 끓는 물을 식히기 위해 밑에서 타고 있는 장작은 내버려 둔 채 위에다 찬물을 조금 붓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끓는 물이란 번뇌를 상징할 터인데, 마음 속 깊이 자리한 번뇌의 뿌리를 놓아 둔 채 아무리 많은 참회를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전에 행한 과오를 뉘우치는 사람은 많지만, 또 다시 그 과오를 되풀이해서 저지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론 개개의 잘못에 대한 참회가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대종사는 낱낱의 잘못에 대해 참회하는 것을 事懺(사참)이라고 말했지만 이 사참만으로 완전한 참회가 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완전한 참회를 위해선 보다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한데 대종사는 이를 理懺(이참)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원리를 깨우쳐서 참회하는 방식이지요. 그리고 이 원리는 탐·진·치라는 삼독 제거로 귀결되는데 이것은 교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봅니다.


최근들어 교화에 대해 교단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관심은 지난 10여 년 동안 벌써 몇 번째인지 모릅니다. 교화가 성공하지 못하기에 이런 관심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교화에도 사참과 이참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화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원인을 그대로 둔 채 교도 수만 늘리려는 것은 이참을 생각하지 않고 사참만으로써 교화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문화관광부 종무실장이 원불교의 미래에 대해 강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그 분은 현재 원불교에는 긴 미래를 위한 준비가 없다고 안타까워하면서 교화 대책도 좀 긴 호흡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조언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교화 전략은 필요할 때마다 강조되는 대증적 처방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사참식 교화 캠페인만 벌인 셈인데 이 캠페인은 결과적으로 상응하는 효과도 적었을 뿐더러 교단 내외의 체력 소모마저 컸습니다.


저는 이 지면을 빌려서 여러 차례 이참식 교화전략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채 또다시 사참식 교화캠페인이 벌어지는 교단의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이 지면에서 언급했던 것들을 두 가지로 정리하면서 이참과 사참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교화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첫째, 교리개발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교리란 종교에서는 상품에 해당하기에 변화하는 소비시장에 부응하기 위해선 새로운 상품이 공급되어야 하지요. 더구나 교리란 우리들 마음의 병을 고치는 약이기에 더욱 고질화된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아니 그 마음의 병을 보다 근본적으로 고치기 위해서도 신약 개발은 부단히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저 긴 불교의 역사를 보아도, 또 기독교의 역사를 보아도 마찬가지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우리는 대종사가 만든 법이 훌륭하니까 하고 자족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아무리 훌륭한 법이라도 끊임없이 연구 개발 되지 않으면 치열한 교화경쟁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둘째, 시대에 맞게끔 원불교도 브랜드 관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원불교 브랜드는 한마디로 과거지향적입니다. 교당 건축물도, 교당 내부도 그러합니다. 또 교무님들의 복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하나 이 시대 코드에 맞는 내용과 형식이 없습니다. 원불교에 매우 우호적인 종교학자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조차도 그의 책에서 이 점들을 안타깝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 인구의 절반이 몰려 있는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이 원불교 하면 제일 먼저 흑석동 서울회관 건물을 연상하는데 이 건물은 간판 등으로 이미 누더기가 되어 도저히 종교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시대를 앞서갔던, 그래서 브랜드 관리에도 탁월했던 대종사의 뜻과는 거리가 자꾸만 멀어지는 듯 합니다.


지금 우리 교단의 문제는 현재의 교화가 어렵다는 점만이 아니라고 봅니다. 미래를 위한 교화도 결코 낙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큰 문제입니다. 지금 어렵더라도 내일은 잘 되리라는 기대가 있으면 희망을 갖고 넘어갈 수 있는데 미래에 대한 전망이 그리 밝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렵더라도 미래가 밝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길을 택해야 하는데 그것은 사참과 이참이 조화될 때 가능하리라 봅니다. 이런 식의 교화전략이 교단의 향후 4~5백년을 준비하는 핵심고리로 볼 때 1백주년을 준비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의 존재는 그 의미를 더하리라고 봅니다. 원남교당 /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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