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한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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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한 통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12.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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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현숙 교수의 생활의 발견

군밤, 군고구마, 호빵, 이것들에서 공통적으로 연상되는 것은 ‘겨울, 따뜻함, 훈훈함’ 등이다. 이런 음식들이 있기에 한겨울 추위도 낭만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음식들이 우리들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거나 차가운 마음까지 녹여주지는 못한다. 얼어붙은 우리 마음을 녹이려면 그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미소 짓게 만들어 주는 것 중에 편지가 있다. 마음으로 쓴 편지 한통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고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소중한 열쇠가 된다. 손끝 정성으로 한자 한자 써내려간 편지는 서로에게 따스함과 편안함을 안겨다 준다.


이렇게 얘기하면 “디지털 시대에 ‘편지’는 무슨?”이라고 콧방귀를 뀌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사실 정감이 묻어나는 자필 편지는 어느덧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연말연시에 성탄절 카드나 연하장, 핸드폰문자, 결혼기념일이나 생일 같은 특별한 날조차 e메일이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대체하고 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실 나는 글재주가 없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작문시간을 제일 싫어했고, 그 흔한 글짓기 상 한 번 타 본 적이 없는 터라 편지 쓰는 게 영 쉽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애용하는 까닭은 우선 내가 편지를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취미까지는 아니지만 가끔 내 방 서랍에 빼곡히 쌓여있는 편지를 읽는 것을 좋아한다. 편지를 읽는 동안에 행복했던 일, 힘들었던 일, 가슴 아팠던 일, 감격에 겨웠던 일을 떠올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추억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내가 받은 편지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 유학시절에 지도교수님이 보내준 수제카드이다. 교수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송구스러운 마음보다는 교수님이 제자에게 주시는 따스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 행복감에 젖어들곤 했다. 이런 행복을 맛 본 후로는 나는 가능하면 편지로 내 마음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또 하나 내가 즐겨 읽는 편지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개정되기 전 세대이신 부모님께서 주신 편지이다. 철자법이 안 맞는 서투른 언문체로 쓰신지라 가끔 무슨 말인지 한참 생각해야 해독이 되곤 했지만 이것들을 읽는 즐거움은 다른 어떤 편지보다도 더 하다. 미사여구(美辭麗句)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녹아있는 편지를 읽다보면 어느새 눈물콧물이 범벅이 되곤 한다.



다음으로 내가 편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말로는 하기 힘든 말을 대신할 수 있는 최상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세대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 서툰 편이다. “뭐 꼭 그런 걸 말로 해야 알아? 척 하면 알아먹어야지!”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 우린 못해요~.” 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직설적인 애정 표현에 익숙지 못한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이 바로 편지이다. 편지라면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옴직한 닭살멘트도 가볍게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편지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준다. 부부싸움의 경우도 말로 하다보면 점점 수위가 높아져 종국에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을 꾹 참고 그 때 하고 싶었던 말을 편지에 적어보자. 자신의 심경을 편지로 쓰다보면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상대방에게 전할 수도 있고, 자신이 잘못한 점을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 된다. 이렇게 편지는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는 것을 멈추게 해주는 신비한 영약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편지는 조그만 선물로도 큰사랑을 전할 수 있는 아주 경제적이고 유용한 존재이다. 한 번 생각해 보시라! 선물만 딸랑 받았을 때, 간단한 쪽지가 담긴 선물을 받았을 때, 카드가 곁들인 선물을 받았을 때, 정성스런 편지가 함께한 선물을 받았을 때의 느끼는 감동의 정도를! 답은 나올 것이다. 선물의 가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편지라는 사실을 ….



이 정도 얘기하면 “편지가 좋은 줄은 알겠는데 그거 시간도 많이 걸리고 귀찮아서 쓰는 게 여간 어렵지가 않아요”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편지가 꼭 길이나 형식에 구애를 받을 필요는 없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편지가 『레미제라블(장발장)』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출판사에 보낸 편지였는데, 편지지에 적힌 내용은 「?」였고 이 편지에 대한 답신은 「!」였다. 여기서 「?」의 의미는 “독자들의 반응은? 팔리기는 하나?” 등등의 의미가 함축된 것이었고, 「!」의 의미는 “너무 훌륭하오! 아주 잘 팔리오!” 라는 함축된 말이었다. 이렇게 길이나 형식을 무시하고 연습장 이면지이건, 카드이건, 편지지이건, 길든 짧든, 잘쓰든 못쓰든, 진솔하게 자기의 감정을 글로 담는 것이 편지라고 생각하면 의외로 편지 쓰는 일이 쉽게 느껴질 수 있다.



우선은 생일, 결혼기념일, 크리스마스와 같은 기념일에 선물과 함께 편지를 쓰는 습관을 가지는 것부터 출발을 해보자. 그리고 편지 쓰는 일에 자신감이 붙게 되면 점차 주위 사람들로 범위를 넓혀보도록 하자. 이번 연말에는 교무님께, 종법사님께, 일가친척에게, 가까운 선후배에게, 학창시절 선생님께, 오래된 친구에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담뿍 담긴 편지 한 통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이 편지 한 통이 세상을 ‘맑고 밝고 훈훈하게’ 해주는 위력을 발휘해 줄 것이다. 이문교당 /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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