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부처님과 법신불사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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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부처님과 법신불사은님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1.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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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현성 교도와 함께하는 정전공부2

정전의 맨 첫머리에서 밝혀 주신 원불교 공부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온전한 마음으로 정신 차리기’라고 앞에서 말씀드렸다. 우리 공부법은 매 순간마다 온전한 마음으로 초롱초롱하게 깨어나서 상생으로 인연 걸고 복 지으며 살아가는 공부이기 때문에 굳이 출가 재가를 나누지 않았다는 점도 함께 말씀드렸다. 그렇다면 우리 원불교인들은 정전에서 밝혀 놓으신 신앙의 대상이며 수행의 표준인 ‘법신불 일원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절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형상으로 모셔놓고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으면서 공부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정전에서는 ‘법신불 일원상’이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조사의 심인’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절에 모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형상과 우리의 일원상은 다른 것인가?


‘부처’라는 단어는 15세기 문헌에는 ‘부텨’로 표기되어 있으나 음운의 변화를 입으면서 ‘부텨’가 ‘부처’로 바뀐 것이다. 이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budda(붓다)’에서 왔다. 부처의 한자 표기 ‘불(佛)’도 산스크리트어 ‘붓다’의 고대 중국어 음역 표기인데 또 다른 음역 표기로는 ‘불타(佛陀)’가 있다. 그 소리는 비록 다르지만 ‘깨달은 자’라는 뜻에서 같은 의미라고 하겠다. 부처라는 단어도 그 기원을 따져보면 이렇듯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여 여러 소리로 드러나듯이 신앙의 대상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형태를 달리할 수 있다. 절에 모신 불상이 ‘깨달은 자’의 생전 모습이라면 우리 일원상은 ‘깨달은 자’의 본래 면목이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깨달은 자’ 부처님의 그 본래 면목이 바로 ‘법신불’이라고 깨우쳐 주셨고, 우리 믿음의 한 가운데에 심어주셨다.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신 부처님의 본래 면목, 법신불의 형상을 둥그신 일원상으로 드러내 주셨다. 그래서 우리의 ‘일원상’은 ‘일원상부처님’인 것이다.


흔히들 일처리를 잘못해서 부끄러워질 때 ‘면목이 없다’라는 표현을 한다. ‘면목’의 뜻풀이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얼굴이나 낯, 또는 외양’이라고 했지만 이 표현의 속뜻인 ‘부끄럽다, 죄송하다, 미안하다’라는 의미에 비추어 보면 ‘면목’은 우리의 외양보다는 내면에 밀접해진 표현이라 하겠다. 온전한 생각으로 매 순간마다 정신을 챙기지 못해 우리의 본래 면목을 잃어버렸을 때, 내 바깥의 존재에게 면목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 차리기 공부법’은 내게 갊아 있는 본래 면목인 이 ‘일원상부처님’을 먼저 찾아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매 순간마다 우리의 ‘정신 차리기 공부법’으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다 보면 내 안의 부처님께서 지닌 권능과 위대함을 확인할 수 있고, 그것을 확인한 후에는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내가 미워하든 사랑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세상의 모든 존재는 본래 그 면목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서로서로 죄 주고 복 주는 존재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참가한 ‘템플 스테이’에서 어느 스님으로부터 법문 한 말씀을 받들 수 있었다. “불상에게만 불공할 줄 알면 뭐가 되는지 알아? 말 그대로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이여. 내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매일 마주 대하는 그 사람이 죄주고 복주는 권능을 가진 존재니까 그 사람에게 잘 혀”


그 법문을 들으면서 우리 교무님께서나 하실 법문을 스님께서 하신다는 생각에 참 신기했다. 우리의 일원상부처님 신앙은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일체 만유가 내게 베풀고 있는 은혜를 발견하고 보은하고 감사하는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법의 위대함이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님의 일원대도를 통해서 진리적 종교의 신앙으로 이 세상에 다시 드러난 순간이다. 돈암교당 /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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