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부처님과 법신불사은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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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부처님과 법신불사은님4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2.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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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현성 교도와 함께하는 정전공부 4

대종사님께서 정전에서 밝혀주신 일원상부처님을 바깥에서 구하게 되면 그것은 죽은 공부라고 앞에서 말씀드렸다. 제불조사들께서는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 안에 갊아 있는 이 일원상부처님을 깨달아 찾기 위해 그렇게 눈에 불을 쓰고 스스로를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언어도단의 입정처이고, 유무초월의 생사문이신 일원상부처님께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나타나실 때는 시방삼계가 장중의 한 구슬처럼 소소영령하게 드러난다. 이 때에는 대소유무의 이치에 더욱 더 정확한 분별이 나타나고, 선악업보에 조금도 틀림이 없는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와 명상은 더할 수 없이 명확해진다. 우리 안에 갊아 있는 이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나타나시는 일원상부처님의 분별성과 차별성의 위력이 존재하는 까닭에 콩 심은 데서 콩이 나고 팥 심은 데서 팥이 나는 인과보응의 진리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주 만유에 가득한 이러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조화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이 세상에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유와 무가 돌고 돌아 지극하면 텅 비어 버린 구공(俱空)이 되지만 허공처럼 텅 빈 구공 역시 온갖 조화(造化)로 가득한 구족(具足)인 것이라고 대종사님께서 진공묘유의 그 자리를 일러주셨던 것이고, 대각하신 후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 되는 이치가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다”는 이 일성도 바로 온 세상에 가득한 일원상부처님께서 드러내시는 진공묘유의 진리와 위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위력이란 진리가 작용할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따라서 일원상부처님의 진리와 그 진리 작용에 의한 이 묘유 현상들이야말로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위력인 것이다. 그런데 일원상부처님께서 우리 앞에 드러내시는 이런 위력을 ‘나’와는 단절시켜 버린 채 별개의 초월적 존재의 창조물로 보고 이 존재를 숭배하는 데에만 빠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근래에 여러 종류의 종교 비판서적이 소개되어 인기를 끌고 있다. 얼마 전에는 몇몇 중앙 일간지에서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쓴 ≪신은 위대하지 않다≫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그를 ‘세계적인 지성’으로, 그의 종교 비평을 세계적 지성이 던지는 비평의 소리로 크게 다루었던 적이 있다.


그는 사람들이 왜 끊임없이 응답 없는 기도를 하고 있고, 자기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자학하고 있나? 라는 데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신이나 종교의 이름 아래 치러진 십자군 전쟁, 나치 및 파시스트와의 타협, 다르푸르 등의 인종청소, 9·11과 자살 폭탄 테러 등등의 인류 역사상 헤아릴 수 없이 저질러진 잔학 행위와 문명 파괴 행위에 대한 실례들을 열거한 후 ‘초월적 존재로서의 절대자’를 숭상하는 세 가지 종교들의 경전을 통절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는 과학의 수준이 각종 유전자를 해석해 내고, 우주의 기원으로 블랙홀을 운운하는 마당에 여전히 동정녀와 부활을 믿는 황당한 믿음을 근거로 인간의 심성과 세상을 망치고 있다고 분노하고 있다.


우리는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이 책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회의(懷疑)하고 탐구하는 능력을 통해 인류의 모델은 인간 그 자체라는 새로운 계몽주의 운동을 벌여야 한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정전에서 일원상부처님의 진리와 그의 작용으로 나타난 진공묘유에 대한 해석을 ‘나와 단절시킨 초월적 절대자의 창조물’로 보는가 아니면 ‘내 안에 갊아 있는 본래 면목의 광명에 따라 분별되고 차별되는 보편현상’으로 보는가에 따라 우상적 종교의 신앙과 진리적 종교의 신앙으로 나누어진다고 하겠다.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일찍이 93년 전에 깨우쳐 주셨던 그 은혜가 다시금 가슴 깊이 사무치며 복받쳐오는 순간이다.


돈암교당 / 국립국어원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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