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법신불사은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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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법신불사은님 1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5.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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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현성 교도와 함께하는 정전공부 16

역경 속에서 은혜를 발견하고, 그 은혜로 행복한 삶을 살려면 사실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금생에 잘못한 게 없다면 전생의 잘못까지, 내 무의식 속에 있던 근본적인 탐·진·치까지 법신불께 솔직하게 고백하고 앞으로 대종사님의 법으로 스스로 변화해 나가겠다는 각오를 법신불께 고백하는 눈물 어린 참회를 해야 합니다.


이 때 솟아나는 눈물은 부끄러움이나 한스러움의 눈물이 아닙니다. 내 안에 쌓인 한을 풀어버리는 정화의 눈물이고, 스스로의 참회 의식을 통해 법신불의 공정함에 감동함으로써 내 안에 갊아 있는 법신불을 감동시키는 눈물인 것입니다. 눈물 어린 참회는 모든 죄업이 본래의 탐·진·치 삼독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고, 죄업의 근본인 그 마음을 멸하게 함으로써 업의 고통 속에서도 은혜를 발견하도록 하는 영혼 정화의 의식인 것입니다.


기도 식순에 따라 영주 21독을 하고, 직접 쓴 참회문을 법신불 전에 봉독할 때에 제 눈에는 하염없는 눈물이 펑펑 솟구쳤습니다. 소법당의 바닥에 엎드려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 눈물은 서른을 갓 넘긴 팔팔한 젊은이가 그동안 살아오며 남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부모와의 갈등과 고통을 진리께 고백하면서 영혼 속에 먼지처럼 쌓아 두었던 원망과 한스러움을 털어버리는 눈물이, 거짓되고 교만하게 살았던 삶에 대한 회개의 눈물일 수도 있지만 이제 대종사님의 일원대도를 바로 만났다는 안도의 눈물이었고, 동시에 영생을 닮아가고 싶은 생전의 스승을 모시게 된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 참회는 영혼 정화의 기초


백팔 배를 한 후 일원상 서원문과 반야심경, 참회게의 순서로 외워 가자 제 머릿속에는 전에 한 번도 원문을 본 적도 배웠던 적도 없던 참회게의 의미가 원문과 함께 환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전에 지었던 바, 모든 악업은 본래 있던 탐·진·치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我昔所造諸惡業 皆由無始貪瞋痴]. 몸과 입과 마음 따라 일어났던 일체를 이제 모두 참회합니다[從身口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 죄라는 것은 자성에는 없고, 마음 따라 일어나는 것이니 마음이 멸할 때 죄도 또한 없어지는 것입니다[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죄도 없어지고 마음도 없어져서 모두 공한 것, 이것이 바로 이른바 참된 참회라 할 것입니다[罪亡心滅兩俱空 是則名謂眞懺悔].”라는 이 참회게를 외우면서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모릅니다.


16년 전 삼동원에서 21일 동안 펑펑 울면서 간절한 참회를 마쳤을 때 그 전까지 한없이 고통스럽고 원망스럽게만 느껴졌던 모든 상황들이 법신불 사은께서 제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역사처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 날의 삼동원은 지금처럼 봄이었습니다. 정진관 옆으로는 그림처럼 조실이 앉아 있었고 조실 뜰 앞에 서 있던 철쭉과 영산홍 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욕심에 가려 제 본래 면목을 보기 전에는 그냥 무심코 지나쳤던 세상 풍경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천지의 지극한 공정함과 정성스러움이 갊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지극한 신심과 적공이 없었다면 어떻게 대종사님의 일원대도를 만날 수 있었을까? 누나와 동생의 출가가 없었다면 내가 어찌 이렇게 은혜를 입고 거듭날 수 있었을까? 대종사님께서 이 법을 펴시지 않았다면, 그리고 우리 교무님들께서 대종사님의 법대로 사시지 않으셨다면 어찌 내가 삼동원에서 법신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 모두가 간절히 보은해야할 은혜였습니다.




# 참회를 통해서 깨닫게 된 네 가지 은혜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도문에 들어오는 모든 수도인은 크건 작건,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참회를 통한 이런 영혼 정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합니다. 초발심도 이런 정화의 과정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정화하는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본래의 내 면목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생길 수 있으며, 그 기준에 따라 일상의 경계 속에서 올바르게 마음을 쓸 수 있는 ‘마음공부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회를 통한 영혼 정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수도인들이나 본래 자신의 탐·진·치 삼독심을 보지 못하는 수도인들은 도의 잣대가 자신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밖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속의 교화법처럼 타인의 허물을 드러냄으로써 끊임없이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대종경 교단품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대 십대 제자가 과실을 범한 자의 허물을 덮어주면서도 은연 중 참회할 마음이 나도록 교화하는 방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능히 꾸짖어서 바로 잡아야 할 때는 면전에서 엄하게 꾸짖어야 하겠지만 허물을 덮어 주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참회의 마음을 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교화 방편이 교당과 교단에 자리 잡으려면 본래 우리에게 자리 잡은 삼독심을 바라보고 이것을 법신불께 진솔히 참회하는 공부법이 우리의 ‘팔자 고치는 마음공부법’으로 일반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암교당/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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