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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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5.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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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박제권 원로교무와 함께하는 정산종사 수필법문 3

팔정도


정산종사 팔정도(八正道)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1. 정견(正見)의 이(理)는 우주의 이치를 불생불멸로 보는 것이 정견이며, 모든 이치를 그대로 바르게 보는 것이 정견이다. 그와 반대로 다르게 보는 것은 사견(私見)이니 이치를 보되 대소유무로 정견하라.


정견의 사(事)는 불편불의(不偏不倚)하여 시비를 가리되 희로애락에 끌리지 아니하고 제 삼자의 비판과 같이 냉정하게 보는 것이다.


2. 정사(正思)는 이치를 바르게 보았다 할지라도 자주 생각지 아니하면 매(昧)하여 지는 것이니 자주 생각하는 것이다. 일에 있어서도 시비를 가렸다 하여 잊어버릴 것이 아니라 더욱 연마하여 끝까지 잘되도록 생각하는 것이며 언제나 기울어짐이 없는 바른 생각을 발하는 것이다.


3. 정어(正語)는 정견·정사 한다면 말 역시 바르게 나올 것이다. 말이란 마음의 표현이기에 진리에 맞고 바르게 해야 하며 일을 당하여서는 시비에 바른 말을 해야 한다. 정어는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것이다.


4. 정업(正業)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지 행동에도 언행(言行)이 구비하여 처사를 잘 하는 것이다.


5. 정명(正命)은 정업을 오래하면 정명은 저절로 된다. 공자님의 ‘칠십(七十)에 종심소욕(從心所慾)하야 불유구(不踰矩)라’는 말과 같이 천명(天命) 그대로 하게 되면 천지와 나의 마음이 둘이 아니 천명 그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생활 수단을 정당하게 하여야 한다. 출가위는 정의행(正義行)으로써 수도하며 살아간다.


6. 정정진(正精進)은 공부를 하되 간단없이 시종(始終)이 여일(如一)하게 하는 것이다.


7. 정념(正念)은 일념 청정함이 여여부동(如如不動)하여 동(動)하여도 분별에 착(着)이 없어서 삼계육도가 평등일미(平等一味)요, 정(靜)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아 영지불매(靈知不昧)한 것으로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계이다. 단, 정사(正思)는 바른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요, 정념은 공적영지(空寂靈知)에 합일 된 경지이며 바른 생각이 언제나 주해 있는 경지이다.


8. 정정(正定)은 오래 선정(禪定)하여 본래면목에 합한 경지에 이르면 일원과 더불어 일체가 되어 정(靜)하여는 공적영지의 광명이 발하고, 동(動)하여는 지공무사한 행이 된다.” (원기32년)




자력과 타력


정산종사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공부할 때에는 반드시 자력과 타력이 함께 한다. 타력은 자력을 근본하고 자력은 타력에 의지해서 불즉불이(不卽不離)의 형태를 이룬다. 그러나 사람 중에는 타력에 편중하여 자력을 잃고 자력에 편중하여 타력을 망각하는 사람이 있다. 즉 부처님을 절대의 신(神)이라 생각하여 ‘부처님의 신력(神力)으로써 성불하게 하여 주시라’는 타력신앙 만을 주장하는 자가 있고, 또는 부처님이 별것이 아니요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하여 계율과 인과를 부인하는 자력신앙 만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 이 두 가지는 결과에 있어서 과불급(過不及)의 착오를 일으킬 것이다. 여러분이 송(誦:외우는)하는 삼귀의를 놓고 보자.




첫째, 귀의불(歸依佛)이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에게 귀의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은 어떠한 사람인가? 부처님은 오직 선각자일 뿐이다. 즉 지공무사한 자리를 먼저 깨치고 그대로 행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 후진들은 그 부처님에게 귀의하여야 되나니 이것은 타력신이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처처불상의 진리를 깨쳐 천만경계를 당할 때마다 부처님을 모시는 것 같이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도 역시 완전한 자력을 얻지 못한 타력이다. 여기에서 부처님과 내가 둘이 아닌 것을 깨쳐 부처님과 더불어 하나 되어 자심불(自心佛)에 귀의하는 것이 완전한 자력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자력은 타력으로 인해서 점차 완성을 얻게 되는 것이며, 타력은 자력을 근본해서 그 목적을 달성하니 구경에 있어서는 자타가 구공(俱空)한 부처의 지경에 귀의한다.




둘째, 귀의법(歸依法)이라 하였다. 이는 법에 귀의하자는 것이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은 부처님이 각(覺)을 얻는 실지 경험에 의한 법이다. 즉 지공무사한 이치를 밝혀 놓으신 것이다. 밝혀 놓으신 경전에 귀의함은 타력이요, 나아가 만유가 대성경(大聖經)임을 알아 지공무사한 자리를 아는 것은 다음 단계이지 완전한 자력은 못된다. 여기에서 나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합법(合法)이 되는 것이 완전한 자력이다. 그러나 역시 자타가 구망(俱忘)한 자리에서 경전을 근본 삼고 만유를 경전 삼아 지공무사한 자리를 깨쳐 그 법에 합해야 한다.




셋째, 귀의승(歸依僧)이라 하였다. 이는 승에 귀의하자는 것이다.


승은 부처님을 받들고 법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수행 하는 선지식에게 귀의하여야 하나니 이는 타력이요, 나아가 선악(善惡)이 개오사(皆悟師)임을 알아 그대로 수행 함이다. 여기까지도 완전한 자력을 얻지 못한 대상이 있는 타력이며, 다시 여기에서 진일보(進一步)하여 자심(自心)의 스승을 발견하여 양심이 인심(人心)을 교화하는 것이 완전한 자력이다. 자타를 초월한 자리에서 밖으로 수도승(修道僧)을 스승삼고 선악을 개오사(皆吾師)로서 공부의 기회로 삼아 일일시시(日日時時)로 자기가 자기를 가르쳐야 한다.” (원기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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