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법신불사은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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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법신불사은님4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5.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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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현성 교도와 함께하는 정전공부19

정전에서는 편착심(偏着心)을 없애야 천지의 광대 무량한 도를 체 받을 수 있고, 만물의 변태와 인생의 생·로·병·사에 해탈(解脫)을 얻어야 천지의 영원불멸한 도를 체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편착심(偏着心)은 국어사전에 표제어로 등재되지 않은 단어입니다. 편이란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친 마음으로 편견을 말합니다. 착이란 어느 한 쪽에만 고집하거나 집착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편착심은 정견이 아닙니다. 자기가 아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의 능한 것에 집착하거나 고집하는 마음들이 편착심이라 할 것입니다. 설령 정견이라 하더라도 집착해버리면 사견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 안에서 누구나 가지고 있을 고집의 한 면은 한 편 바꾸어 생각해 보면 투지와 연결됩니다. 이 고집은 일을 성사할 수 있도록 하는 투지와 추진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합리적으로 진행해야지 개인의 욕심이나 감정에 싸여서 진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편착심에 따라 취사를 하게 되면 자연 마음이 크고 바르게 열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막힘이 많고 결말이 좋지 않게 됩니다.


예타원 종사님께서는 천도의 공을 들여도 영가가 천도를 얻지 못하는 경우는 재물과 명예, 애욕에 집착하게 되는 마음 때문인데, 재물과 명예, 애욕에 집착하는 것도 무서운 것이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의 주관적 견해에 집착하는 마음이라 하셨습니다. 참회문에서도 마지막 부분에서 밝히시기를 비록 견성을 하였다 할지라도 천만 번뇌와 모든 착심이 동시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견(邪見)에 빠지지 말라고 착심에 대해 경계하였습니다.




편착심 없는 취사 이르는 공부법


편착심을 없게 하는 공부법으로 정전에서는 좌선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禪)은 모든 공부의 기초입니다. 터를 닦지 않고 집을 지을 수 없는 법입니다. 선을 하지 않고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마음공부를 한다는 것은 터를 닦지 않고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단전주 좌선의 10가지 공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착심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편안한 자세로 호흡을 가늘고 고르게 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위로 솟아오르는 기운들이 단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아주 고르고 가늘어진 호흡이 한없이 길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숨을 쉬고 있는지 그냥 호흡 속에 멈추어 있는지 모를 정도로 적적하고 성성한 상태에서 단전에 따스한 기운이 모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쇠구슬 같은 것이 등을 타고 올라 정수리를 거쳐 얼굴로 흘러내리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이런 좌선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내가 품었던 생각이 바른 판단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내 욕심과 누구를 미워하던 마음, 어리석었던 마음들이 가라앉으면서 그 한 편에 부끄럽게 숨어 있던 내 본래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좌선을 통해 착심을 제거해도 일에 따라서는 내 생각이 정견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법신불전에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며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간절하게 전후 사정을 법신불전에 고백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도 취사를 결정하기 어려우면 간절한 기도가 끝난 후에 동전이나 대나무 가지를 가지고 점을 쳐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스승님께 전후 사정을 말씀드리고 감정을 받아야 합니다. 좌우 동지들과도 의견을 나누고 소통을 해야 합니다. 편착심이 없는 취사는 하루아침에 금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털 같은 날들의 순간순간 마음을 놓지 말고 챙기는 불방심의 공부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광대무량하고 영원불멸한 천지의 덕


천지의 도가 운행하면서 나타나는 것이 천지의 덕이라 하셨습니다. 불생불멸한 성품자리와 인과보응의 진리를 확고히 신앙하면서 편착심이 없는 취사를 하려고 노력하는 원불교인은 만물의 변화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 착심이 들어서 만물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고 생로병사의 해탈을 막는 것이므로 착심을 버리면 곧 해탈의 경지라 할 것입니다.


편착심을 없애어 천지의 광대무량한 도를 체 받고 만물의 변화를 수용하여 영원불멸한 천지의 도를 체 받게 되면 변과 불변의 이치를 알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게 되어 천만 변화를 주재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치에 대해서 정산 종사께서는 원리편 34장에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변하는 이치와 불변하는 이치로 이룩되어 있나니, 우주의 성주괴공과 사시의 순환이며 인간의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은 변하는 이치에 속한 것이요, 불변하는 이치는 여여자연하여 시종과 선후가 없는지라 이는 생멸 없는 성품의 본체를 이름이니라. 우리는 변하는 이치를 보아서 묵은 습관을 고치고 새로운 마음을 기르며 묵은 제도를 고치고 새로운 제도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그 변화 가운데 불변하는 이치가 바탕해 있음을 깨달아서 한없는 세상에 각자의 본래 면목을 확립하여 천만 변화를 주재하며, 원래에 세운 바 서원을 계속 실천하여 천지로 더불어 그 덕을 합하여야 할 것이니, 이는 곧 천지의 변화하는 이치를 보아서 변할 자리에는 잘 변하며, 천지의 불변하는 이치를 보아서 변치 아니할 자리에는 또한 변치 말자는 것이나, 변과 불변은 곧 둘 아닌 진리로서 서로 떠나지 못할 관계를 가지고 있나니, 그대들은 이 변 불변의 둘 아닌 이치를 아울러 깨달아서 각자의 공부 길을 개척하라.” 하셨습니다.


광대무량하고 영원불멸한 천지의 도를 체 받아 생활하면 먼저 우리의 마음에 세계 일가의 큰 정신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정신을 세상에 널리 베풀어서, 일체 생령과 함께 광대무량한 큰 낙원의 생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날로 달로 마음을 새로이 하고 이 공부 이 사업에 더욱 정진함으로써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대 세계주의의 선도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돈암교당/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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