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법신불 사은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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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법신불 사은님5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5.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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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현성 교도와 함께하는 정전공부20

‘도(道)’가 운행될 때 나타나는 것이 ‘덕(德)’이라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칼의 도는 날카로움이고, 그 날카로움이 운행될 때 비로소 물건을 자를 수 있는 칼의 덕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도’라는 것은 어떤 존재가 ‘왜 있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칼은 날카롭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칼이 날카롭지 않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요?


정산 종사께서는 우리가 ‘사은의 공물(公物)’이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도’가 운행됨에 따라 존재가 드러난 것이고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덕’에 따라 생명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도와 덕을 받아서 사는 존재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은의 공물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천지의 여덟 가지 도 가운데 여섯 가지를 살펴보면서 천지의 광대무량한 도와 영원불멸한 도를 말씀드렸습니다. 천지의 광대무량한 도가 운행되었을 때 비로소 편착심이 없는 덕이 구현됩니다. 천지가 지닌 영원불멸한 도가 운행되었을 때 비로소 만물의 변태와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탈의 덕이 나타나게 됩니다.


정산 종사께서는 법어 도운편 24장에서 “대종사님께서 우주 만물을 한 집안 삼으셨던 것, 이것이 대세계주의, 일원주의라”고 하셨습니다. 우주 만물을 한 집안 삼을 수 있는 대세계주의, 일원주의는 천지의 광대무량하고 영원불멸한 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광대 무량한 천지의 도와 영원불멸한 천지의 도가 있어야 비로소 대세계주의, 일원주의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편착심에서 벗어나고, 생로병사의 해탈을 얻어 대세계주의로 나가야 합니다. 생로병사에서 해탈하는 방법은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일원상 진리를 신앙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일원상 부처님의 진리를 지극히 신앙하는 것이 천지의 영원불멸한 도에 다가가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귀신합기길흉’과 천지의 도


이제 천지의 여덟 가지 도 가운데 일곱 번째 길흉 없는 도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정전에서는 “천지의 길흉 없는 도를 본받아서 길한 일을 당할 때에 흉할 일을 발견하고, 흉한 일을 당할 때에 길할 일을 발견하여, 길흉에 끌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부대인(夫大人) 여천지합기덕(與天地合其德)하고, 여일월합기명(與日月合其明)하며 여사시합기서(與四時合其序)하고 여귀신합기길흉(與鬼神合其吉凶)이라. 선천이천불위(先天而天弗違)하며, 후천이봉천시(後天而奉天時)하니, 천차불위(天且弗違)온, 이황어인호(而況於人乎)이며, 황어귀신호(況於鬼神乎)이여. 이 뜻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릇 대인이라 함은 하늘과 땅과 더불어 그 덕을 같이하며, 그 밝음을 같이하고, 춘하추동 사계절의 질서를 따르고, 귀신과 같이 길흉을 같이 하나니, (대인은) 하늘에 앞서 행해도 하늘에 어긋남이 없고, 하늘에 뒤져도 하늘의 때를 받들어 간다. (대인은) 하늘에 어긋나지 않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며, 귀신에게 있어서랴!” 주역에서 귀(鬼)는 음이고, 신(神)은 양을 가리키므로 결국 ‘음양(陰陽)’을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대인은 음양 상승의 이치에 따라 변화를 주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정산 종사께서는 법어 원리편 34장에서 “변화 가운데 불변하는 이치가 바탕에 있음을 깨달아서 한없는 세상에 각자의 본래 면목을 확립하여 천만 변화를 주재하라”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변화의 원리는 ‘음양 상승의 이치’라는 것이 공리(公理)입니다. 공리는 불변입니다. 따라서 정산 종사의 이 법문은 변화 가운데에 ‘음양 상승의 이치’가 있음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길흉에 끌리지 않는다 함은 길흉을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음양상승의 이치를 알아 변화와 불변을 주재하되 길흉에 끌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길흉에 끌리지 않으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중도의 삶으로써 길흉을 초월하기


대산 종사께서는 법문집 3편에서 길흉에 끌리지 않는 삶에 대해서 ‘널뛰는 삶’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널의 중간에는 아무 변화도 없으나 널의 양쪽 끝에 있으면 오르락내리락 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사람들이 음양상승하는 도를 따라 흥망성쇠(興亡盛衰)와 길흉화복(吉凶禍福)과 빈부귀천(貧富貴賤)과 고락영고(苦樂榮枯)를 겪게 되는 것과 같다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흥할 때 망이 바로 따르고, 망할 때를 잘 넘기면 흥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 흥망 어디에도 끌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널의 양끝에 매달려 있는 삶이 아닌 널의 중간에 있는 삶이 바로 중도 있는 삶이고, 이것이 바로 길흉을 초월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중도 있는 삶은 개인의 영달을 노리고 권력과 재물을 좇아가는 기회주의자의 삶이 아닙니다.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눈치를 살펴서 자기의 이익에 따라 요령껏 살아가는 삶은 중도 있는 삶이 더욱 아닙니다.


중도 있는 삶이 되려면 먼저 우리 마음이 크게 공변되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결정할 때 내 욕심에 묶인 사리(私利)가 아닌 공변된 마음으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대의(大義)를 좇아 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대의가 없는 중도는 기회주의자의 변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기회주의자는 빙공영사(憑公營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공적영지의 광명은 인과보응의 진리에 따라 빙공영사하면 빙공영사하는 그대로를 세상에 드러내어 버립니다.


중도의 삶을 살아가려고 스스로 노력할 때 일원상 부처님의 진리는 비로소 변·불변을 주재할 수 있는 위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은혜 속에서 다시 은혜를 만들 수 있고, 역경 속에서 다시 은혜를 생산하는 진급의 삶은 공변된 마음으로 음양 상승의 이치에 따라 중도 있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나 내리는 천지의 축복인 것입니다.


돈암교당/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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