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들판의 이름없는 꽃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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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들판의 이름없는 꽃이 된다면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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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정탁 교수의 세상읽기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일입니다. 언론정보대학원 책임자로 있을 때 대학원생 대표들이 제 방에 찾아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는 뜬금없이 “원장님, 차를 바꾸시지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소형차인 프라이드를 몰고 다녔는데 대부분 사회인이었던 원생들 판단으로는 자신들이 다니는 대학원 원장님의 차가 소형차라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듯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차로 바꿀까”라고 물었더니 “그래도 소나타 정도는 타고 다니셔야 하지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제 원생들은 프라이드는 소형차이고, 소나타는 중형차이기에 두 종류의 승용차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서 중형차인 소나타를 사도록 권유한 듯합니다. 그런데 프라이드 승용차의 편리성, 경제성, 안전성 등을 고려하면 굳이 중형차를 구입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힘듭니다. 자동차란 제 다리 기능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기에 고장 나지 않고 오래 탈 수 있으면 저로서는 그만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만큼 프라이드와 소나타 차 사이엔 놓여 있는 차이를 크게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승용차의 경우에서 보듯이 물질문명은 우리들을 자주 미망에 빠뜨립니다. “소형차만 있으면…” 하던 사람들도 중형차를 보면 소형차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 차를 사려고 합니다. 또 중형차를 마련하더라도 대형차의 위력을 알게 되면 마음이 또다시 흔들립니다. 소형차든 대형차든 모두가 ‘일천강에 떠 있는 달’인데도 우리들은 이런 미망을 위해 죽기 살기로 덤벼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망도 따지고 보면 잘못된 감각작용과 그것의 연장에 해당하는 언어작용의 결과이지요. 그래서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우리들의 잘못 된 감각작용을 꼬집으며, 도덕경 제 1장에서는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를 도라고 부르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이라고 부르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으로 그릇된 언어작용을 비판합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문명비판가였던 장 보드리야르도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광고란 제품들 사이에 별 있지 않은 차이를 극대화 하는 메카니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느끼는 제품 간의 차이는 그 내용물의 차이가 아니라 광고의 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A 커피와 B 커피에 있어서 맛의 차이는 별로 없지만 광고가 그 차이를 크게 부각시켜서 마치 맛의 차이가 큰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정 커피의 맛을 고집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광고가 만들어 내는 언어 조작에 속아 넘어 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언어 작용의 이런 심각성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 초등학생이 글짓기를 했는데 그 글 내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언론에 한번 보도된 적이 있었지요. “… 저는 50평 아파트에 사는데 제 친구는 27평 아파트에 살아요. 그래서 그 애는 참 가난해요…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초등학생은 평수란 집 크기를 말해주는 방편에 불과할 뿐인데 그 방편으로서 가난함과 부유함을 구분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셈이지요.


그런데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비단 어린아이에게만 국한된 것일까요? 아마도 우리들 일상은 이런 식의 언어구성과 언어소비로서 대부분 구성될 것입니다. 학생들이 좋은 학교에 진학하려고 왜 그렇게 많은 애를 쓸까요? 물어보나마나 좋은 간판을 따기 위해서이지요. 학생들이 졸업을 하면 유망한 중소기업을 마다하고 대기업에 입사하려고 할까요? 어쩌면 결혼 할 때 괜찮은 배우자를 만나려고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또 직장에서 출세하려고 사람들은 그렇게 노력하는 것일까요? 과장보다는 부장이, 부장보다는 중역이, 중역보다는 사장이나 회장이라는 직책이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이지요.


재산도 마찬가지 논리가 작용할 것입니다. 재산이 50억인 사람과 100억인 사람은 우리들 보통 사람 눈에는 똑같이 부자라고 보여지는데 재산 50억인 사람은 100억인 사람을 염두에 두면서 자신은 부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능력과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재산을 늘리는 데 몰두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행복을 두 배 이상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환상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들은 언어가 만들어내는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식의 언어조작으로부터 우리들 마음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공자는 이에 대해 ‘이순(耳順)’이라는 답을 제시했습니다. 이순이란 공자가 그리는 완성된 인간의 모습으로서 ‘귀(耳)를 순하게 한다(順)’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큰 소리나 작은 소리, 좋은 소리나 나쁜 소리, 밝은 소리나 어두운 소리, 웃는 소리나 우는 소리 등 모든 소리들이 우리들 귀에 똑같이 들리는 것을 말하지요. 즉 소리에 따른 구분이 없어야 합니다. 물론 이순이라고 했기에 귀로 듣는 것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지요. 눈으로 보는 것, 코로 맡는 것, 혀로 맛보는 것, 피부로 느끼는 것 등 오관을 통해 인식하는 것 모두를 똑같이 느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깥의 대상만을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깥의 대상만을 접하는 것이라면 이순으로 족하지만 우리들은 자신을 꾸미는 기호를 수없이 만들어내고 이것이 자신들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들 삶이란 기호를 소비하면서 동시에 기호를 만들어내는 작업일 것입니다. 우리들 이력서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우리들은 이력서를 의미 있게 꾸미기 위해서 평생 노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 이력서가 우리들 삶의 본질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그러면서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기호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런 기호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충동이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저 들판에 이름 없는 꽃이 꽃 중에서 가장 자유롭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꽃들에 대해 제각각 이름을 부여하지만 이름을 부여받는 순간 꽃들은 사람의 흔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람들 편의대로 이름이 지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소나무 스스로가 자신을 절개의 상징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래서 어느 누구로부터 흔적이 없는 저 들판의 꽃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바로 이럴 때 우리들 마음공부가 제 길을 찾을 수 있겠지요.


원남교당 /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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