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꽃이 피는 미지의 땅 아프리카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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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도 꽃이 피는 미지의 땅 아프리카와의 만남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8.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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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스와질랜드교당 봉불식 참관기 1, 나선화(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무덥고 긴 장마가 이어지던 7월 21일 저녁, 인천 국제공항에서 여성회를 제외한 41명의 인원이 A조와 B조로 나뉘어 홍콩으로 향하는 케세이 퍼시픽 항공기와 남아프리카 항공기에 분승하면서 아프리카 탐방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4시간 후에 닿은 홍콩을 경유하여 다시 13시간 15분간의 비행 끝에 일행은 남아프리카의 황금의 도시 요하네스버그에 안착 할 수 있었다.


낯선 문명, 미지의 땅인 아프리카에 대한 호기심은 원불교가 닻을 내린 아프리카를 만나는 기대감, 자부심, 안도감과 뒤섞여 탐방단원 전체는 마치 수학여행을 하는 학생들처럼 생기발랄하였고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한 일행은 아프리카대륙에 내딛는 첫 발걸음의 느낌을 가질 틈도 없이 바로 짐바브웨의 폭포로 날아갔고 빅토리아 폭포 부근의 리조트에 들어서면서야 비로소 남부아프리카 대륙과 정식으로 대면 인사를 하게 되었다.


섭씨 30도가 넘는 한 여름의 땅인 아시아 동쪽 끝, 한반도에서 지구의 반을 돌아 도착한 남부아프리카의 짐바브웨는 극동아시아의 한국인들에게 아프리카의 강렬한 햇빛과 함께 코끝에 상쾌하게 닿는, 맑고 시원한 공기와 푸른 하늘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탐방단이 처음 만난 아프리카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건조하고 메마르며 뜨거운 날씨에 전란과 기근으로 황폐하기만 한 대륙이 아니었다. 한 겨울이라고 하는데, 푸른빛을 유지하고 있는 상록의 나라였고 인간이 활동하기에 가장 좋은 온도와 습도를 지닌 쾌적한 날씨였다.


더욱이 세계 3대 폭포의 하나인 빅토리아 폭포의 웅장한 모습은 2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의 피로를 대자연의 기운으로 말끔히 날려 줄 만큼 생명력이 용솟음쳤다.


그 곳에는 20세기 산업사회의 황폐함이 스며들지 않은 신비한 태고의 자연풍광과 치솟는 물보라에 피어오르는 오색무지개가 곳곳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녹색의 장원이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검은 얼굴의 활달한 여성 관광 안내원은 유창한 영어로 빅토리아 폭포에 대한 설명을 “1955년 영국의 탐험가 리빙스톤이 발견하여 ‘빅토리아’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폭포는 그 곳의 원주민에 의하여 ‘천둥의 소리’라는 이름을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다. 태고부터 아프리카를 지키고 있었던 생명의 용소 이었기에 빅토리아 폭포와 대면한 일행은 모두 환호로써 아프리카와의 첫 인사를 폭포 앞에서 나누며 미지의 땅에 대한 불안감을 폭포에 다 던져 버렸다.


석양을 보는 잠베이 강의 보트 쿠르즈에서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노래를 강물위에 띄웠고 다음날은 국경을 넘어 잠비아 쪽에서 빅토리아 폭포의 아침과 만나 자연과 동화되는 시간을 가졌다. 자연을 통하여 우리와 더욱 가까워진 아프리카는 우리에게 경치 좋고 날씨 좋아서 사람살기 좋은 땅으로 각인되었다.


빅토리아 폭포의 청정한 기운을 향유한 일행은 자연에서 벗어난 대도시 요하네스버그를 거쳤다가 다시 새로운 풍광인 아프리카의 대평원을 달리게 되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대 평원은 바쁜 일상에 묶여있던 교무님들과 교도님들의 마음을 여유롭게 해주었고 세 시간 이상 이어지는 단조로운 평원의 풍경에 고운노래, 흥겨운 노래, 전국 각지에서의 활동 이야기들을 풀어내었기에 지루함이 없었다.


평원에 해가 떨어진 시각쯤에 이르러, 한국인의 눈에 친숙한 펑퍼짐한 높은 산이 나타나 일행 모두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늘 산 밑, 또는 구릉의 경사면에 마을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시나 마을을 찾아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역시 그 산 밑에는 요하네스버그와 같은 서유럽의 문명권 도시와는 달리, 동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작은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촐하면서도 단아한 라마코카 원불교 선교소와 우리 동네에 보던 것과 같은 어린이 놀이기구가 있는 유치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황량한 평원을 지나 듬직한 산 아랫마을에 자리한 작은 선교소는 원불교 교무님들의 열정과 혼신으로 세워졌기에 정겨우면서도 안쓰러웠고, 포근하면서도 대견했다.


라마코카선교소는 아프리카 청소년들에게 작은 컴퓨터 교실을 통하여 IT시대 문화 교육으로 그들에게 작은 희망 보급소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이곳을 통하여 우리는 또다른 아프리카와 만나게 되었다. 유럽의 신기술과 자본으로 백인만을 위한, 백인들의 도시를 건설하는데 피땀을 제공하고도 신 도시의 혜택이나 과학 문명에 대한 배움의 기회도 갖지 못하였던 가슴 아픈 아프리카 사람들의 역사를 직면 할 수 있었다.


선교소의 이 작은 노력이 희망의 불빛이 됨은 분명하지만 이미 물질의 상대적 빈곤을 깊이 경험한 이들에게 물질의 혜택과 함께 미래를 위한 동양의 정신문명을 어떻게 전할 것이며 이들과의 진정한 동화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는 이 여정의 화두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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