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벽시계
상태바
할아버지의 벽시계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9.18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 전시경 (서울봉공회 시민환경분과위원)의 NGO칼럼

친정에 가면 시계가 하나 있습니다. 제 기억 속에서도 40년이 넘은 것을 보면 무척 오래되긴 했습니다. 70년대에 집집마다의 벽에 매달려 매시간 땡땡거리며 시간을 알려주던, 많은 분들이 ‘아, 그거’ 하고 떠올리는 바로 그 시계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시계에 하얀 종이가 씌워져 있었습니다. 마치 영정사진처럼….


“아버지, 저게 뭐예요? 섬뜩하게, 사람 죽은 거 같잖아요.” “갑자기 멈췄는데 태엽도 다시 감고 여러 방법을 써 봐도 안가네. 습관적으로 자꾸 쳐다보게 돼서 가려놨어.” “그래도 당장 종이는 떼요.” 남편은 “고장난거 아니까 차라리 바늘을 12시에 맞춰 놓으면 어떨까요”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고장 난 시계를 그 자리에서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덜 헷갈릴지에 온통 쏠려 있었습니다. 이미 그 시계는 아이들에게도 외갓집 하면 떠오르는 없어서는 안될 하나의 표식이었으니까요.


세상에는 물건들이 넘쳐납니다. 예쁘고, 간단하고, 편리하면서 가격까지 착한(?) 새 상품이 매일매일 쏟아져 나옵니다. 사람들은 흔쾌히 물건을 사면서 싸게 잘 샀다고 만족해 합니다.


이렇게 순간적인 구매의 즐거움을 안겨준 이삼천원짜리 티셔츠며 기타 고만고만한 물건들이 집안 곳곳에서 사용될 날을 기다리다 버려집니다. 일회성 소비가 세상의 흐름으로 자리하다보니 얼리어댑터라고 신제품을 남들보다 먼저 사서 써보고 곧 또 다른 신제품으로 계속 바꾸어 나가는 사람을 칭하는 말도 생기고, 패스트패션이라고 해서 옷을 유행에 맞춰 빠르게 입고 빠르게 버리는 것이 시대를 앞서 가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키게 합니다.


그런 소비행태가 얼마나 많은 자원과 생명을 단축시켜 폐기물화 하면서 환경을 오염시키는지에 대한 고려나 제품 생산 시간과 단가를 줄이기 위해 제3세계 주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는지 등은 끼어들 틈새가 없습니다. 당연히 내가 소비하는 제품은 현재적 시점에서 잠시 자신을 드러내 주는 포장에 불과할 뿐 당장에 잃어버려도 별로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나고 물건은 그냥 물건이지 그 속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추억이 없는 것이지요. 친정의 낡은 벽시계가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것은 제 유년과 청년이 거기 있기 때문이고 저희 아이들의 성장이 그 속에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20년째 쓰고 있는 스텐 냄비와 금성사 선풍기에는 남편에게 갓 지은 따뜻한 밥을 먹게 하려는 신혼의 제 모습이 있고 영동지방의 초여름 무더위에 고생하는 배부른 아내를 위한 남편의 배려가 들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또 누군가가 쓰고 오는 털모자를 보며 서로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봅니다. “오빠, 이거 원래 오빠 거였어?” “응, 나도 옛날에 너처럼 작았나?” 열여섯살 차이나는 사촌들의 이야기꺼리도 되어주고 가족이라는 무언의 유대도 만들어줍니다.


서양 영화에서 결혼하는 딸에게 고이 간직했던 자신의 웨딩드레스를 물려주고 그것을 엄마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면서 입는 장면을 보며 우리는 멋있다고 부러워하지만 막상 나한테 그런 드레스를 세탁해서 입자고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문득 자발적 빈곤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자발적 빈곤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물질의 과다한 혜택을 거부하고 오로지 필요한 최소한의 소비를 지향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돈에 얽매이지 않는 간소한 소비의 소박한 삶은 모두가 동경할 수는 있지만 그대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노릇입니다. 하여 쉽게 사서 쉽게 버리는 습관을 없애는 것과 함께 분수껏 쓰고 살지 말고, 분수보다 조금 덜 쓰고 사는 삶을 살아보자고 제안합니다.


쥐어짜듯 억지로 소비를 줄이자는 것이 아니라 구매 전에는 꼭 있어야할 물건인지 다시한번 생각하고 일단 산 제품은 정말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다시 쓰고, 바꿔 써서 불필요한 낭비와 쓰레기화를 막아보자는 것입니다. 오래된 물건을 잘 건사하는 것은 구질구질한 삶이 아니라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오늘 이름 모를 누군가의 절박한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것일 수 있으며, 미래에 후손들이 사용할 자원을 남겨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 마지막 이야기. 친정집 벽시계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처음처럼 반듯하게 달려있지는 못하지만 7자 방향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똑딱거리는 모습이 반갑고 다행스러웠습니다. 여러분들의 추억 속에는 무슨 물건이 있는지요.


여의도교당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