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있어 수행과 영성이 갖는 의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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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있어 수행과 영성이 갖는 의미1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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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상의 교무의 인도 문화 가까이 보기

지금까지 인도에서 보고 느낀 스승들과 아쉬람을 소개하면서 수행과 영성의 의미를 소개하였으나 다시한번 인도의 영성문화와 수행문화가 인도인들의 삶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사이바바와 박티 요가


인도에는 현재 사이바바의 영향이 매우 커서 택시에서나 버스에서나 또는 상가 가게에서나 어디든 사이바바를 모시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만큼 인기가 있다.


필자는 미국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할 때 사이바바에 대한 비디오를 학생들과 함께 본적이 있다. 그 때 느낌은 사이바바의 기적이 마술과 같은 느낌을 받아 사이바바에 대한 관심을 깊이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비디오를 통해 보았던 사이바바는 처음 사이바바가 아니고 이후 그 사이바바의 후신이라고 자처하면서 나온 새로운 사이바바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인도를 방문했을 때는 원래 사이바바가 있던 지역을 보게 될 계기가 있어 방문하게 되었다. 하루에도 수십만 수백만이 방문하는 사이바바 사원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두세시간 이상씩 빽빽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사이바바 동상과 함께 시신을 안치한 곳에 이를 수 있었다.


이후 한국에서 온 젊은 여성기독교인을 만나 사이바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방문한 사이바바 아쉬람은 원 사이바바의 후신으로 알려진 바로 필자가 비디오로 본 사띠야 사이바바 아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여성은 사띠야 사이바바를 본 이후 완전히 인생관이 바뀌고 더 이상 사이바바를 보지 않아도 그 때의 심경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사띠 사이바바는 어렸을 때부터 공중에서 금을 만들어내는 등 기적을 행사하며 유명해 지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1년에 한 차례씩 몸에서 금을 만들어 내고 그가 기적으로 만든 금으로 아쉬람만이 아니라 고아원, 양노원, 학교 등을 유지하며 복지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여성은 사이바바가 대중을 만나기 위해 나왔을 때 경험을 들려주었다. 즉 사이바바는 수십만이 자신을 기다리는 장소에 와서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다 마주쳐 주는데 그의 자비로운 눈길과 그의 몸 전체에서 풍겨오는 광채는 황홀경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신학을 공부한 그는 예수님의 기적이 거짓이 아니라는 느낌과 함께 살아있는 자비광체에 자신의 마음이 다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한다. 그리고 그 아쉬람에서 머물면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사이바바를 살아있는 신으로 여기며 그의 존재는 단지 육신 속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쉬람 전체에 있어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나 그들의 움직임을 다 보고 있다고 여길만큼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우파니샤드와 베단타 전통에서는 스승의 존재는 신과 같은 존재로 여긴다. 즉 스승은 진리 자체로 스승을 통하여 진리를 체험하고 깨달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수행상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즉 신과 같은 스승 앞에 완전히 자신존재 전체를 바치면서 수행자는 아상을 비롯한 사상을 완전히 놓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완전히 스승께 바치지 않고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승은 제자의 거울이 되어 제자의 수행을 제대로 알아 그에 필요한 가르침과 방편을 베풀어 제자가 아상과 사상의 족쇄에서 벗어나 대아의 우주를 체험하게 한다. 요컨대 수행자는 자신을 완전히 놓고 온통 스승에게 귀의하면서 자신의 껍질을 벗어나게 되고 자신의 껍질을 벗고 진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진리에 완전히 이르게 되면 더 이상 스승이라는 관문은 사라지게 되는데 스승은 깨닫기 전 수행자에게 신과 같은 존재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즉 진리는 언어명상으로 나타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명상이 돈공한 그 자리는 바로 수행자가 완전히 아상을 비롯한 사상을 벗어났을 때만이 증득할 수 있는 것이므로 수행자의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그 상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오직 진리를 증득한 스승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우파니샤드라는 말의 의미가 “스승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앉다”라는 의미가 있고, 선불교 전통에서 ‘직지인심 견성성불’에서 주장하듯이 ‘직지(直指)’나 말로써 전해질 수 없는 진리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이심전심은 바로 우파니샤드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인도철학의 주요 개념가운데 ‘범아일여’는 바로 우리의 본래심과 우주심이 원래 하나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도의 수행전통은 본래심을 회복하여 우주심과 하나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이루기 위한 수행의 길을 의미하는 요가라는 말은 바로 이 인도의 수행전통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이 수행의 길을 의미하는 주된 요가는 박티요가, 까르마 요가, 즈나나요가 그리고 라자요가이다. 라자요가는 바로 최상의 요가로 범아일여 즉 우리의 본래심과 우주심이 하나되는 수행이라면 앞의 세요가는 수행자의 개성에 따라 수행하는 길이다. 여기서 박티 요가는 헌신의 요가로 완전하게 자신을 無하고 놓아버리고 스승에 혹은 신에게 완전히 맡기는 것인데 진리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도 하는 것은 마음에 새길만 하다.


다시 사이바바에 대해 말하자면 사이바바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사이바바를 무소부재한 신처럼 여기고 아쉬람에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다 보고 있다고 믿고 완전히 자신을 비어버리는 것은 박티요가의 길로써 바로 진리에 이르게 하는 것(the direct way)이라고 볼 수 있다. 사이바바를 한번 보고 그를 완전히 신처럼 여기고 완전히 자신을 놓아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사이바바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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