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란 세상일까, 텍스트란 세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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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세상일까, 텍스트란 세상일까?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02.0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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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정탁 교수의 세상읽기

플라톤의 ‘대화편’에 보면 <파이드로스(Phaidros)>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가 가져온 것을 파르마콘(pharmakon)에 비유했는데 파르마콘이란 일종의 묘약으로서 치료제이자 동시에 독에 해당합니다. 사실 모든 약은 이런 양면적 요소를 지니고 있지요. 항암 치료제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항암약을 투여하면 암은 치료되겠지만 그 부작용으로 인해서 환자가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런데 약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사가 모두 이런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일도 항상 좋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요. 내일만 되어도 나쁘게 작용하는 경우를 왕왕 경험하게 되지요. 새옹지마(塞翁之馬) 이야기도 이래서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라는 이중적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이 축복만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저 바람이 있다면 축복과 저주로 구성된 모든 세상사에서 축복의 비율이 조금 높았으면 하는 소박한 것이겠지요.


이런 세상사 이치를 두고 관련 학자들은 세상을 하나의 ‘텍스트(text)’에 비유합니다. 텍스트란 책과 구별하기 위해 등장한 용어인데 책에는 일관된 줄거리가 존재하지만 텍스트에는 그런 일관된 이야기가 없어서입니다. 텍스트는 가로 세로의 실이 서로 교차하면서 직물(textile)을 짜 나가는 교직성과 같은 의미의 계열에 속하기에 일관된 줄거리도 없을뿐더러 어느 곳에도 중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텍스트는 완벽한 체계가 없으며, 언제나 다른 천이 또 접목되어 상호텍스트의 조립이 가능하고 또 연합텍스트 형성도 가능한 열린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책은 저자의 의도에 입각해서 쓰여진 짜여진 글입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기승전결(起承轉結)과 같은 형식을 동원해서 내용을 구성하곤 합니다. 그래서 가로 세로의 실이 교차해 가면서 자유롭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텍스트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책에는 주인공이 있고, 그 주인공을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닌 사람들은 세상은 신(神)이란 저자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라는 생각을 갖곤 합니다. 이에 비해 불가에서는 상호만남의 연기(緣起)를 통해 세상이 구성된다는 텍스트적 입장에 서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텍스트로서 구성되었다면 신과 같은 최초의 시원(始原)도, 또 최종의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궁극적 소기(所記, signifier)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텍스트적 사유에서는 하나님과 같은 강력한 일원론적 세상을 거부합니다.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기에 거기서 어떤 시원과 목적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고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하나의 근원적 출발점도 없고, 되돌아갈 종국적 귀착점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어서 좋은 것과 나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행복한 것과 불행한 것, 심지어 내 것과 남의 것도 정확히 경계 짓는 일이 불가능 합니다. 즉 모든 세상사는 자기만의 독특한 의미를 소유하고 있지 않고, 오로지 다른 계기들을 만나서 접목되는 관계의 매듭에 의해 그 특성이 결정될 뿐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일점의 근원인 신에 의해 비로소 시작된 성선(聖善)의 ‘책’이 아니라 처음부터 좋은 것과 나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행복한 것과 불행한 것 등이 함께 어울려져 짜 나간 그런 ‘텍스트’라고 봅니다.


이에 반해 기독교에서는 세상은 신에 의해 창조된 의미로서 가득 차 있다고 말합니다. 즉 이 세상은 의미의 창조자로서 최초의 원인이자 마지막 목적인 신의 현존적 존재로 통일되고 귀결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신은 일원적 진리의 중심이면서 최초의 근원이고, 전체적 의미의 완벽한 체계이고, 만물 속에 현존하는 영원한 선의 모형인 셈입니다. 즉 세상은 신이 저술한 책이기에 그 책의 내용은 신의 진리가 백과사전처럼 다 담긴 완벽한 체계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신에 의해 완벽하게 창조된 이 세상에 악(惡)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요? 이 때문에 악의 존재는 기독교 사상에서 가장 골치 아픈 대목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잘못(아담이 뱀의 유혹에 빠져 신의 뜻을 거스르고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으로 악이 추후에 우연적으로 이 세상에 등장했다고 말합니다. 악은 기독교 사상에서 하나의 스캔들인 셈입니다. 20세기 서양철학계를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던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J. Derrida)는 이런 신학적 해석에 비판을 가합니다. 창세기 에덴의 동산에는 이미 악을 유혹한 뱀이 아담과 이브와 함께 있었고, 또 선악과가 에덴의 낙원에 공존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불가의 연기론적 사유방식을 지지하는 셈입니다.


나아가 그는 텍스트를 파르마콘처럼 ‘종국적으로 뿌리가 없는 나무’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는 선/악(善/惡), 미/추(美/醜), 호/불호(好/不好) 등의 이항대립쌍의 경우처럼 의미가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게 위함인데 불가에서는 이항대립쌍조차도 양극 간에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호하는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색(色)과 공(空)의 교호를 말하는 “…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단적인 예지요. 이처럼 텍스트가 의미의 젓가락 운동을 하면서 삼라만상에 의미의 고정성을 두지 않는 불가적 사유야말로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편이 아닐까요.


노자도 “모든 것은 그 반대편 것과의 관련성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며, 그 반대 방향을 향해 열려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는 칸막이로 가로막힌 차단벽에 의해 각각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존재하기에 다른 하나가 존재한다는 식입니다. 따라서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하나의 주제나 중심으로 통일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분리된 것도 아닙니다. 노자는 대립쌍들의 서로 꼬임으로 이루어진 세상과 우주의 존재 법칙에 ‘도(道)’라는 기호를 붙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일원상(一圓相)은 모든 대립과 대칭과 갈등을 분해하고 용해하고 해체한 마지막 초월의 상태가 아닐까요?




원남교당 /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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