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의 병진과 도덕 훈련 4, 작업 취사와 온몸으로 정의롭게 살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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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의 병진과 도덕 훈련 4, 작업 취사와 온몸으로 정의롭게 살기 2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03.0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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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현성 교도와 함께하는 정전공부 54

대종사님께서는 번거한 화두와 번거한 경전은 다 놓아 버리고, 화두와 경전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강령과 요지를 밝힌 화두와 경전으로써 일과 이치에 연구력 얻는 과목을 정하셨고, 염불·좌선·주문을 단련하여 정신 통일하는 수양 과목을 정하셨으며, 모든 계율과 과보 받는 내역과 사은의 도를 단련하여 세간 생활에 적절한 작업 취사의 과목을 정하시어 세 가지 공부를 병진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부처님과 같이 모든 이치에 걸림이 없는 연구력과, 부처님과 같이 어떤 현상에도 끌림이 없는 수양력과, 부처님과 같이 불의와 정의(正義)를 분석하여 정의이거든 죽기로써 실행할 수 있는 취사력을 얻기 위함이라고 밝히셨습니다.<서품 19장> 수양, 연구, 취사 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큰 힘이 바로 삼학 공부의 핵심이라 할 것입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취사력 얻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첫째, 정의는 죽기로써 실행하고, 둘째, 불의는 죽기로써 하지 말며, 셋째, 정성을 계속하여 끊임없이 공을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수행품 2장> 따라서 작업 취사의 핵심 단어는 정의(正義)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의는 무엇이고, 불의는 어떤 것일까요?


살인을 꿈꾸는 자폭 테러범의 가슴 속에서도 ‘정의’는 불타올랐을 것이고, 거리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폭력을 추구하는 무리들 속에서도 ‘정의’라는 단어가 회자(膾炙)되곤 합니다. 정의는 바라보는 각도가 어디냐에 따라 개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주관적인 잣대에 비추어 볼 때 자칫 잘못 생각하면 ‘정의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킨다’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 ‘작업 취사’의 공부법으로 말씀하신 ‘정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의(正義)의 개념


대종사님께서 정의를 말씀하실 때는 다음과 같이 항상 ‘인도(人道)’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의 입선 공부는 비하건대 소 길들이는 것과 같나니 사람이 세상에서 도덕의 훈련이 없이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자행자지하여 인도 정의에 탈선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어미 젖 떨어지기 전의 방종한 송아지가 자행자지로 뛰어다닐 때와 같은 것이요”<수행품 55장>, “시대가 더욱 밝아짐을 따라 삿된 무리는 발붙일 곳을 얻지 못하고 오직 인도 정의의 요긴한 법만이 세상에 서게 될 것이니, 이러한 세상을 일러 대명천지(大明天地)라 하나니라”<전망품 9장>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신 정의의 첫 번째 조건은 ‘인륜과 도덕에 어긋남이 없는 것’입니다. 대단히 주관적일 수 있는 정의(正義)의 개념에 ‘인륜과 도덕’이라는 객관적 기준을 함께 부여함으로써 정의에 ‘보편적 가치’를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정산 종사께서는 무시선의 강령 가운데 ‘일심과 정의, 잡념과 불의의 관계’에 대해 묻는 학인의 질문에 답하시기를 ‘일심이 동하면 정의가 되고, 잡념이 동하면 불의가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일심이 되려면 잡념이 떨어져야 합니다. 불가에서 잡념은 다양한 뜻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삿된 마음과 착심을 일러 잡념이라 합니다. 삿된 마음이나 착심은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 ‘희로애락’의 감정에 집착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가 ‘감정’에 집착하게 되면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정산 종사께서 일념이 정의라고 하신 말씀의 본의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분노한 마음에 집착해서는 정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에 집착해서는 정의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의는 인륜과 도덕에 어긋남이 없으면서, 동시에 사사로운 감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타원 종사께서는 ‘정의’는 ‘진리에 합하는 것’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3.1 운동 정신과 정의(正義)


금년은 3.1 운동이 일어난 지 90년이 되는 해로서 지난 주 일요일이 삼일절이었습니다. 우리는 3.1 독립 만세의 근본정신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가졌던 총칼 앞에서도 우리 민족이 두려워하지 않고 한 마음으로 분연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삼일 운동의 기본 정신에 ‘전 인류의 공존동생(共存同生)’이라는 대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열들께서 순국의 대열 앞에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의 선언문에서처럼 일본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고, 인도주의와 평화주의라는 공변된 마음으로 인류의 대화합을 추구하고, 사랑을 나누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신의 없음을 죄 주려 하지 않고, 일본의 의리 없음을 책망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현재에 충실하고, 미래의 영광을 준비하기에 바쁜 우리는 일본이 범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시간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3.1 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에 맞서 우리 민족이 하나 되어 일어난 대화합 운동이었습니다. 군국주의의 무력에 맞서서 ‘인류평등의 대의’와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밝히기 위해 일어난 대평화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3.1 운동은 정의로움 그 자체였다고 할 것입니다.




정의로움 연마하기


대산 종사께서는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공부 가운데 동(動)은 밖으로 정의를 행하여 모든 덕을 쌓는 공부로 ‘외행정의(外行正義)’를 가리키고, 정(靜)은 안으로 계율을 지켜서 모든 악을 끊는 공부, ‘내수계율(內修戒律)’이라 하셨습니다. 안으로 계율을 지키는 것과 밖으로 정의를 행하는 것을 둘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작업 취사 공부는 계문을 준수하는 것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삼십 계문을 생활 속에서 대조하여야 부처님과 같은 실행력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계문을 범했을 때는 습관이 안 되기 위해 법신불 전에 참회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대산 종사께서는 상시일기, 주의(注意), 조행(操行), 참회 등은 과거 현재의 모든 악을 고쳐서 선을 실행하는 공부인바 극치에 이르면 대중도행 . 대보은행 . 대원만행 등의 덕행이 나타나게 되나 상 없는 무위이화의 덕화가 되려면 덕행이 나타나게 된 뒤에도 늘 계속 정진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정전대의 9, 삼학>


돈암교당/대통령실 연설기록담당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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