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의 병진과 도덕 훈련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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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의 병진과 도덕 훈련7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04.02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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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현성 교도와 함께하는 정전공부 57

지난번에 이어서 계속 믿음과 서원과 계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계문 가운데 특히 살도음(殺盜淫)의 계문을 중계라고 합니다. 이 중한 계문을 지키지 못하고 범하게 되면 우리의 본래 영성이 흐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업력이 밀려와서 공적영지의 광명을 가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밀려오는 업들은 마치 장막을 치는 것과 같아서 밖에는 중천의 해가 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에는 깜깜한 밤이 계속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초롱초롱하게 살아 있으려면 에너지가 필요한 데 계문을 지키지 않으면 에너지를 충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계율을 어기는 것은 처음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 어기다보면 그 다음부터는 자꾸 어기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계문을 지키지 않으면 빛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매일매일 해가 조금씩 짧아지듯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계율이 있다는 의식도 못하게 됩니다.


계율과 내 안의 등불


목숨이 붙어 있어도 붙어 있는 것이 아닌 상태가 됩니다. 내 안이 밝아야 생활이 밝아지는데 밝아질 수 없게 됩니다. 내 일상생활이 밝아서 초롱초롱한 상태가 되지 않으면 삶이 초롱초롱해지지 않게 됩니다. 마치 마음에 철창이 채워지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한번 마음에 철창이 채워지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스승님이 필요합니다.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스승과 동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진리 앞에서 고백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참회와 고백으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경산 종법사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처럼 참회에는 봉공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시간이 없으면 내가 가진 재물을 덜어서 대중을 위해 이익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서서히 내 안의 빛을 밝혀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내 안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합니다. 내 안의 빛이 꺼질 때 마음의 난리가 일어납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마음의 난리를 평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대종사 선원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공부법은 난리 세상을 평정할 병법(兵法)이요, 그대들은 그 병법을 배우는 훈련생과 같다 하노니, 그 난리란 곧 세상 사람의 마음 나라에 끊임 없이 일어나는 난리라, 마음 나라는 원래 온전하고 평안하며 밝고 깨끗한 것이나, 사욕의 마군을 따라 어둡고 탁해지며 복잡하고 요란해져서 한없는 세상에 길이 평안할 날이 적으므로, 이와 같은 중생들의 생활하는 모양을 마음 난리라 한 것이요, 병법이라 함은 곧 우리의 마음 가운데 모든 마군을 항복받는 법이니 그 법은 바로 정(定)과 혜(慧)와 계(戒)를 닦으며, 법(法)과 마(魔)를 구분하는 우리의 수행 길이라, 이것이 곧 더할 수 없는 세계 정란(靖亂)의 큰 병법이니라.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마음 난리는 난리로 생각하지도 아니하나니 어찌 그 본말을 안다 하리요. 개인·가정과 사회·국가의 크고 작은 모든 전쟁도 그 근본을 추구해 본다면 다 이 사람의 마음 난리로 인하여 발단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마음 난리는 모든 난리의 근원인 동시에 제일 큰 난리가 되고, 이 마음 난리를 평정하는 법이 모든 법의 조종인 동시에 제일 큰 병법이 되나니라. 그런즉, 그대들은 이 뜻을 잘 알아서 정과 혜를 부지런히 닦고 계율을 죽기로써 지키라. 오래오래 쉬지 아니하고 반복 수행하면 마침내 모든 마군을 항복받을 것이니, 그리 된다면 법강 항마의 법위를 얻게 되는 동시에 마음 난리에 편할 날이 없는 이 세상을 평정하는 훌륭한 도원수(都元帥)가 될 것으로 확신하노라.”<수행품 58장>


참회와 삼학 공부


지금 당장 내 기억 속에 계문을 어긴 바가 없다 하더라도 어느 생에라도 어겼을지도 모를 잘못에 대해 참회를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스스로 참회할 줄 모르고, 참회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 공부하는 것입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선을 행하고도 남이 몰라주는 것을 원망하면 선 가운데 악의 움이 자라나고, 악을 범하고도 참회를 하면 악 가운데 선의 움이 자라나나니, 그러므로 한 때의 선으로 자만자족하여 향상을 막지도 말며, 한 때의 악으로 자포자기하여 타락하지도 말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요훈품 26장>


참회하는 공부를 하지 못하고 기도를 시작하면, 참회하는 공부를 하지 못하고 좌선을 시작하면 반드시 마장이 붙게 되어 있습니다. 좌선을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참회하는 공부법을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좌선을 시작하거나 기도를 시작하면 스스로 큰 정력을 얻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설령 큰 정력을 쌓았다 하더라도 그 힘을 올바로 쓰지 못하게 되어 스스로 불행한 길을 걷게 됩니다.


참회는 세상의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있게 합니다. 스스로 밝아질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참회는 내 안에서 꺼진 불씨를 살리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밝은 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내 안을 밝혀야 합니다. 내 안의 불씨가 꺼져버렸는데 정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름지기 수행자라면 참회하는 데에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종교에 보편적인 코드가 있다면 바로 ‘참회’입니다. 참회는 자신의 성업을 봉찬할 수 있는 출발이기도 합니다.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한 때에 악을 범한 사람이라도 참 마음으로 참회하고 공덕을 쌓으면 몸에 악한 기운이 풀어져서 그 앞 길이 광명하게 열릴 것이요, 아무리 한 때에 선을 지은 사람이라도 마음에 원망이나 남을 해칠 마음이 있으면 그 몸에 악한 기운이 싸고돌아서 그 앞길이 암담하게 막히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요훈품 32장> 우리는 참회문에서 사참(事懺)과 이참(理懺)으로 참회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정산 종사께서 사참의 방법에 대해 하여 말씀하시기를 “첫째는 대원을 발하여 작은 욕심을 끊는 것이요, 둘째는 사실을 대조하여 선악의 이해를 판단해 보는 것이요, 셋째는 진정한 마음으로 항상 법신불전에 참회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요, 넷째는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으로 매양악업을 고치기에 노력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경의편 31장> 삼학 공부의 출발은 참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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