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를 연상시킨 큰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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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를 연상시킨 큰 어른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05.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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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경식 교도의 틈새 선진열전 2, 응산 이완철 종사편

용산 한강로 2가에 있는 서울교당은 본래 일본인이 전몰장병 천도를 위해 세운 용광사(龍光寺)란 절이었다. 일제시절 정책적으로 야금야금 경복궁을 훼손했는데, 경복궁의 부속건물로 문무 인재를 뽑던 융문당·융무당을 헐어낸 건축자재를 옮겨 용광사를 지은 것이다. 무인을 뽑던 융무당은 요사채로 쓰이고 문인을 뽑던 융문당은 법당으로 꾸몄다. 준공기록이 1935년으로 돼 있으니 겨우 10년을 쓰고 저들이 패전으로 물러갔고, 절은 적산(敵産)으로 되어 원불교가 불하를 받은 터였다.


말썽 많은 하이원빌리지 신축을 위해 2006년에 철거되어 영산 등지로 옮겨져 아쉬움이 크지만, 내가 입교하던 당시엔 두 건물 외에도 일본절의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우선 대각전 뒤쪽에는 부서지고 깨어진 소형 불상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는데, 우리 불상과는 모양이 다를 뿐더러 석상이 아닌 석고상 같은 것에 울긋불긋 색깔을 입힌 것도 있었다. 그리고 남쪽 담장 앞에는 석조 지장보살의 입상이 석대 위에서 다소곳한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앞쪽 오른편에 종각이 있었다. 종은 중고품 대종을 구입한 것이지만 종각은 옛것이 아니라 당시에 새로 지은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 종을 매일 쳤는데 종치기는 당시 감원監院(요즘으로 말하면 덕무)으로 있던 보양 씨라는 여자 분이었다. 그녀가 종 치는 것을 두어 차례 유심히 보던 끝에 나도 한 번 울려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대신 종을 치겠노라고 보챘다. 내가 치면 나이든 여자보다야 힘차게 더 잘 칠 것만 같았다.


“이게 쉬운 것 같아도 경식 씨는 안 돼요!”


자존심이 상한 나는, 문제없다고 큰소리치며 보양 씨를 밀어내고 천장에 매단 당목(撞木)을 잡았다. 두어 번 흔들흔들 예비 동작을 하고는 힘껏 밀었다. 뎅! 생각보다는 소리가 그리 크지 않다. 이번에는 좀 더 세게 밀어보리라. 나는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나서 숨을 멈추고 안간힘을 쓰며 힘껏 밀었다. 데엥!


너무 조급했던가, 당목의 방향이 흔들려 당좌를 정확히 때리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옆에서 지켜보던 보양 씨는, 이제 그만두었으면 하는 눈치가 역력한데 내 욕심은 그게 아니었다. 여기서 그만두면 요샛말로 쪽팔리지 않는가. 누구는 뭐 처음부터 잘했으랴, 반복하면서 자신감을 얻는 거지. 나는 스스로를 격려하며 다시 당목을 밀고 또 밀며 몇 차례를 거듭 쳤다.


그러나 소리는 점점 비틀렸다. 주어지는 힘도 강약이 어긋났고 시간 간격도 장단이 들쭉날쭉하다 보니, 맥놀이가 제대로 생기지도 않거니와 생겼던 맥놀이마저 중동이 부러져서 엉망이 되었다. 보양 씨가 더는 못 보아주겠다는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나를 밀어냈다. 보양 씨가 다시 당목을 잡자 종소리는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고, 신비한 맥놀이와 함께 용산 하늘 멀리까지 은은히 퍼져나갔다. 기가 꺾인 나는 종을 다 치도록까지 지켜보며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늦가을 오후의 스산한 바람결에 은행잎은 엽서인 양 날았다. 종각을 벗어나 마당에 깔린 은행잎을 밟으며 나서노라니 뜻밖에도 은행나무 밑 벤치에 앉아 계신 응산 이완철(應山 李完喆) 교무님이 눈에 들어왔다. 박박머리에 검고 긴 눈썹, 움푹 들어가 자리 잡은 눈망울, 깊이 파인 미간의 주름, 짙은 콧수염과 비뚤어진 입. 나는 평소에도 이 원로님을 뵐 때마다 달마상을 떠올리곤 했지만, 특히 그날 그 순간 모습을 뵈며 달마 스님을 연상하였다.


“종을 힘으로만 치간디?”


아! 응산 님은 내가 하는 짓을 다 보고 다 듣고 계셨구나, 생각하니 절로 속이 뜨끔하였다. 나는 위기탈출 프로젝트를 가동하여 노 스승께 치명적인(?) 일격을 날렸다.


“교무님! 등상불 신앙을 일원상 신앙으로 돌린다는 원불교에서 왜 불상을 모시고 그런다요?”


나는 지장보살상을 가리키며 의기양양했다. 사투리가 심한 것으로 소문난 응산님께 짐짓 사투리를 섞어 공격한 것은 음식에 고명을 얹는 격이었다.


“느그는 조것이 돌댕이로 보이냐 보살로 보이냐, 안 그라먼 그냥 미술품으로 보이냐?”


“……?”


나는 의외의 반격에 쭈뼛쭈뼛 할 말을 잃었다.


“보살 맹키로 보이면 예배허고, 미술품 맹키로 보이면 감상허고, 돌댕이로만 보이면 치워야 허것지라!”


맹한 데다가 버릇까지 없는 젊은이를 보고 달마는 빙그레 웃었다.


응산님은 이태 뒤 은행잎이 날리던 시월에 열반에 드셨고, 그 무렵 나는 수도경비사 헌병대에서 최루탄과 곡괭이 자루로 무장한 채 날마다 ‘폭동진압’을 하러 다녔다. 몇 해 후 서울교당에 오니 지장보살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은행잎은 예나 마찬가지로 날리는데 빈 벤치에선 아직도 달마가 빙그레 미소 짓고 계셨다. 나는 가슴이 텅 빈 듯 쓸쓸했다.




응산 종사는 1897년 영광에서 나시니 함평 이씨 동범(장은)과 김해 김씨 남일화가 어버이시다.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셨고, 14세에 강릉 유씨와 결혼하여 1남 4녀를 낳았다. 친형 이동안의 안내로 대종사 뵙고 제자 되어 법명 완철을 받은 것이 원기 6년인 25세 때였다. 1930년, 34세에 출가를 단행하는데 이 해에 장녀 태연도 출가하니, 부녀가 한 해에 출가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후 37세에 경성(서울) 교무가 되고 47세에 수위단에 피선되시니, 이 해에 대종사 열반을 겪게 된다.


63세에 교정원장에 피선되고, 1962년 66세에 정산 종사 열반으로 잠시 종법사 권한대행이 되셨다. 곧 대산 종사를 종법사로 추대한 후 감찰원장으로서 지내다가 1965년에 열반에 드시니, 세수는 69세요 법랍이 35년이었다. 열반 후 종사위에 오르셨다.


문학을 좋아하시어 논설이나 수상隨想 외에도 한시와 우리말 시가를 종종 발표하시었는데 열반 후 <응산종사문집>으로 엮여 간행되었다. 성격이 검소하고 명리에 담박한 분으로, 당신의 부끄러운 일화를 <대종경>에 담게 하시어 후진을 경계하시니 자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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