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는 '줄씨름'이라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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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는 '줄씨름'이라 푼다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07.02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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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해관 교무의 재치문답 6

어릴 적, 우리들 놀이에는 유난히도 씨름이 많았다. 별다른 놀이기구가 필요없이 맨몸으로 할 수 있어서이기도 하고 간단한 준비면 가능해서였을까? 꼽아보면 샅바없이 맞잡고 겨루는 씨름부터 한 다리 들어잡고 싸우는 외다리씨름, 마주서서 양손바닥을 부딪쳐 겨루는 손바닥씨름, 발날을 마주대고 악수하고 겨루는 손씨름, 거기에 팔씨름, 엄지씨름, 무릎씨름, 다리씨름, 나아가 질경이 꽃대를 서로 얽어 겨루는 질경이씨름도 생각나고 잔디 꽃대 수액을 바퉈올려 겨루는 물방울씨름까지 꽤도 다양한 씨름을 즐기며 자랐다. 그 중에 가장 멋진 씨름으로 기억 되는 스릴만점의 놀이로 줄씨름이 떠오른다.




줄씨름은 3미터가량 되는 줄을 허리에 감아쥐고 마주서서 당겼다 풀었다 하며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씨름이다. 그러므로 덩치나 완력보다 놓고 채고 하는 타이밍이 열쇠다. 그러니만큼 줄을 놓치지 않고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낌새의 파악이 중요하다. 땀도 안나고 다치지도 않으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재미난 놀이이다. 그래서 줄씨름은 한덩치하는 철용이도 이길 수 있고 힘센 형님도 아버지도 이길 수 있는 매력만점의 놀이로 기억된다. 어느 날은 열두명까지 연달아 이기는 쾌거를 이룬 적도 있어 지금 생각해도 스멀스멀 뿌듯한 웃음이 고여오는 줄씨름의 추억.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미묘하여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지나니 챙기지 아니하고 어찌 그 마음을 닦을 수 있으리요(수행품1장) 하셨다. 모든 씨름이 그러 하듯이 잡아야 한다. 놓치면 겨루기에서 지고 만다. 줄을 바투 잡아야 한다.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하신다. 그 요란함을 알아차리라 하신다. 경계에 따라 일어나는 내 마음의 그 요란함을 잡아채서 자빠뜨리고 나는 꼿꼿하게 자성의 정으로 일어서라 하신다.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그 어리석음 그 그름의 낌새를 알아차리는 공부를 일상에서 팽팽한 긴장감으로 이어가자 하신다. 그래서 원불교는 ‘줄씨름’이라 푼다. 경계를 대할 때마다 공부할 때가 돌아온 것을 염두에 있지 말라 하신다.(무시선법) 한 경계를 지낼 때마다 삼대력이 겨자씨만큼씩 생긴다 하시며 경계를 먹고 자라는 공부인이 되자 하신다. 그 공부대중의 줄을 놓지말자 하신다. 원불교 일상수행의 묘미요 불지를 향해 줄달음하는 묘방이라 하겠다. 그래서 원불교를 줄씨름이라 푼다.




대산종사 법마상전급에서 이르신다. ①교리를 대체로 알고 어떠한 마군이라도 발견하여 속깊은 공부를 해나가며 삼십계를 지키는데 악전고투하는 급으로서 방심해서는 안 되는 위기이다. ②마(魔)에게 질지언정 마가 숨지는 못하는 급이며 중근에 걸리기 쉬우나 동지와 스승에게 남김없이 통하는 데만 있으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서원과 신심을 더욱 이끌어 주는 스승의 법(法)줄이 있어야 한다. 줄씨름에서 방심은 곧 패배이다. 순간의 방심으로 나의 중심은 무너지고 만다. 이를 종사님께서는 ‘위기’라 이르시며 이 위기를 벗어나려면 법줄을 잡아야 한다고 부촉하신다. 원불교는 줄씨름이라 푼다.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내 법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보통 좋아하는 것만 가지고는 다 모르는 사람이다.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그저 미쳐버려야 다 아는 사람이다. 다른 스승에게 일생을 배워도 다 못 배울 것을 나에게서는 상근이면 들은 즉시 바로 알 것이요, 아무리 하근이라도 몇 달 내지 몇 해만 배우면 다 알게 되어 있지 않은가. 그대들은 이 법줄을 타고 하루 속히 성불 제중의 구경에 도달하라. 이 법은 수만년래에 처음 나온 법이요 앞으로도 수수만년 흘러내려갈 대도이다.”(선외록)




한 학생이 “저는 공부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어 답답하기만 하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사뢰니 말씀하시기를 “줄만 잘 잡고 나가라 그것은 할 수 있지 않느냐? 개인으로는 항마하기 힘들고, 했다 하더라도 곧 떨어지고 항마를 못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법줄을 잘 잡아야 끝까지 올라갈 것이니 끝까지 잡고 죽기 살기로 따라가라. 그러면 되는 것이다. 혼자 이러고저러고 할려고 마라. 혼자되는 법이 아니다”(대산3집) 하신다. 그래서 원불교를 제불제성에 법맥을 이은 불일중휘(佛日重揮) 중성공회(衆聖共會)의 줄씨름 회상이라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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