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라 부르고 싶었던 자애로운 모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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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라 부르고 싶었던 자애로운 모성상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09.02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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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틈새 선진열전 4 / 승타원 송영봉 종사 편



대학생활에 뜻을 잃고 입주 가정교사로 노량진에 머물던 시절, 전차로 한강로를 달릴 때면 동편으로 아주 잠깐씩 보이던 사찰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큰길 옆에는 화강암 돌기둥에 ‘원불교서울지부’라 음각한 검은 글씨가 보였고, 그 글씨 위에 그려진 일원상이 인상적이었다.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정작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1963년 1월쯤인가 나는 전북 삼례 사시던 고모님 댁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역에서 빠져나와 걷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 이 길이 아니지(?) 하면서도 나는 터덜터덜 걸었고 그 길목에서 ‘원불교삼례지부’ 간판을 발견하였다. 여기서 팔산 김광선 선진의 손녀 김대관 교무님을 만났고 소태산 대종사의 영정을 처음 대했다. 교무님은 대종사란 분이 홀로 닦아 진리를 깨친 부처라는 것과, 원불교교전이 간결하지만 팔만대장경의 진리를 다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는 한 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웬 이름도 없이 살다간 평범한 인물을 감히 석가모니부처님과 동급으로 대우하는가. 하기야 그런 환상에 사로잡혀 맹신을 하다 보니 멀쩡한 처자가 시집갈 생각도 않고 저렇게 살고 있겠지. 그들이 안됐다고 생각하면서도 호기심에, 팔만대장경의 진리가 다 들어 있다고 허황된 주장을 하는, 예의 그 책 《원불교교전》을 한 권 사가지고 나왔다.


이후 내가 서울지부를 찾아갔을 때 만난 분이 승타원承陀圓 송영봉宋靈鳳 교무님이었다. 나는 교무님께 원불교의 역사부터 교리까지 무던히도 묻고 따지며 괴롭혀 드린 것 같다. 교무님은 선머슴 같은 나 한 사람을 위해 교사敎史를 통째로 이야기해 주셨고, 귀찮은 문답을 사양치 않으셨다. 참으로 왕성한 발심이었다.


세상을 차지한 듯 기쁨에 열광하기도 하고 혹은 회의를 못 이겨 절망하기도 하던 시절이다. 내가 힘들어 할 때 교무님은 굳이 논쟁하여 이기려 하지 않고 지긋이 기다려 주셨다. 불법에 대한 허상을 깨치고 소태산 대종사에게서 부처의 진면목을 발견하면서 나는 구도의 열정에 몸이 달아올랐다. 마침내 나는 출가만이 내 삶의 의미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 손에 키워졌다. 계조모가 계시기는 했지만, 나의 장래를 결정하는 데는 할아버지의 결심이 절대적이었다. 나는 나의 출가에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할아버지의 반대라고 단정하였다. 나는 날마다 출가서원을 다졌고 밤마다 고민하였다. 서원이 굳어질수록 고민도 커져서 나는 그야말로 밥맛을 잃고 잠을 못 이루는 상황까지 나아갔다.


나는 마침내 조부 설득하기 마스터플랜을 짰다. 우선 원불교 회상에 대해 이해시켜 드리기, 다음엔 원불교 교법의 우수성 알리기, 그리고 원불교 제도와 출가 의미를 설명하여 거부감 줄이기, 마지막으로 단호한 출가 선언. 그래도 끝내 반대하시면 어떡하지?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에서 주인공이, 출가를 반대하는 아버지와의 기 싸움 끝에 마침내 허락을 받아내던 불퇴전의 구도심을 생각했다. 누군들 가족 반대 없이 출가하랴 싶었다. 고심 끝에 나는 단식투쟁이란 작전 계획을 세웠다. 내가 죽기로써 출가를 고집한다면 할아버지라고 어쩌시랴. 그것은 설득 플랜이기보다 협박을 통하여 굴복을 강요하는 플랜이었다.


나는 시골로 내려가서 할아버지를 뵙고 계획을 하나하나 실행했다. 마지막으로 출가 선언을 하기 전날 밤, 나는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몸을 뒤척이며 고민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전의를 다지면서 거듭 ‘단식투쟁’을 다짐했다. 그런데 정작 내 일생일대의 결단을 듣고 난 할아버지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래, 너 좋을 대로 하려무나.”


투쟁이랄 것도 없는 기권승이었다. 나는 온몸의 긴장이 좍 풀리면서 몸도 마음도 풀썩 가라앉았다. 여섯 살에 어미 잃고 여덟 살에 아비마저 잃은 2대 독자를 혼자 키우시다시피 하신 분. 나는 출가하면 당연히 정남으로 살리라고 결심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허락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허락이 떨어진 후에서야 나는 비로소 나의 출가 후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재산도 없고 생활능력도 없는 고령의 할아버지, 그 시봉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부모 대신 나를 이만큼 키워주신 할아버지에 대한 보은을 어찌 할 것인가?


중학생 사춘기시절의 사건이 생각났다. 그때 무슨 일로 나는 할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하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절에 들어가서 중이 돼 버리겠어요!”라고 소리 질렀다. 물론 그럴 생각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그냥 홧김에 한 소리였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갑자기 기가 꺾이더니 울음을 터뜨리시었다. “이놈아 네가 중이 되면 할애비는 어찌 살라고 그런 소릴 하냐?”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출가 서원에 따른 일련의 갈등이 한갓 해프닝이었음을 깨달았다. 교당에선 나의 출가 결심부터 포기까지 아무도 몰랐다. 폭풍같이 몰아쳤던 자신과의 대결에서 열병 같은 사투를 벌였건만 겉에 드러난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나는 승타원 님에게서 어머니의 영상을 그리고 있었다. 교무님은 또 그렇게 따뜻이 나를 보듬어 주셨다. 교무님 앞에서 나는 자꾸 퇴행을 겪게 되었고, 그래서 수줍은 소년으로 뒷걸음치고 있었다. 교무님은 그 무렵 위장병이 심해서 입원하셨지만 정작 문병은 못 갔다. 그러나 금식하면서 수술을 받으신다는 소식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던 나는 숨어서 혼자 울었다.


승타원 님은 정산 종사의 큰따님이시다. 내가 입교하기 전해에 정산 종사는 열반에 드셨지만, 수척한 모습으로 분향소를 지키고 있는 영봉?순봉 자매분의 사진을 보았을 때도 가슴 에이는 슬픔이 전율처럼 전해졌다. 공인이시기에 다정하게 “아버지!”라고 불러보지도 못했다는 회한을 전해 들었을 때도 복받치는 슬픔을 공유했다. 내상內傷은 깊되 내색內色할 줄 모르던 갓스물 ‘소년’의 마음을 교무님은 얼마나 읽고 계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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