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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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 공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11.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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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민 기자의 단어 너머 세상



- 조세희(1976),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준말




2020년 쯤에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타고 있을 줄 알았다. 하루 세 끼는 영양캡슐 세 알로 대체되고, 쓰레기 분리수거나 공과금내기 같이 ‘하면 하겠는데 왠지 귀찮은’ 일들은 개인로봇이 해주겠지, 나는 배터리나 충전해 주면 되고, 라고 생각한 게 불과 20년 전쯤이다.


허나 2009년, 나는 캄캄한 방에서 형광등에게 화를 내고 있다. ‘그거 쉬워, 있던 거 돌려서 빼고 그 자리에 돌려서 넣으면 돼’ 따위의 성의없는 대답은 차라리 말지. 하여간 모르겠고 못하겠는데 어쩌란 말이냐. 21세기가 뭐 이래. 나는 아직도 내 머리를 내 손으로 감고 있는 걸? 생각하면, 흥, 세상은 그닥 바뀌지 않는 것 같다는 말씀.


지난 겨울, 용산참사를 보며 한 소설가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떠올렸다 했다. 수십년이 지났는데, 꼭 그 모냥 그대로의 일이 아닌가, 싶더라는 게 그의 얘기다. 고개를 끄덕끄덕했고, 차라리 소설 속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며칠전, 용산 철거민에 대해 ‘전원 유죄’ 판결이 나왔다.


‘사법 정의는 죽었다’는 말도 인간과 로봇이 싸움질하는 22세기 미래쯤까지 따라오려나. 유죄판결에의 가장 막중한 근거였던 화염병. ‘화염병을 던져 국가 법질서를 유린했다’는 문장 자체에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누가 도시 한복판에서 화염병을 던진다면, 당연히 그 이유를 들어봐야 하지 않나? 그리고, 화염병 이후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음...흠... 혹 ‘가을밤이라 나 왠지 센치해져서’ 듣기 귀찮으십니까?


선고가 있던 밤, 용산을 지나며 슬픔과 탄식을 들었다. 차라리 분노였다면 내 마음이 더 나았을까?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막막했고, 허망했으며, 그리고 숙연했다. 그 흔한 위로나 격려도 없이 그저 ‘사법 정의’의 죽음을 바로 그 현장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세상은 안 변하려나보다. 혁명과 투쟁,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그 어떤 것도 그저 헛된 발악일 뿐인가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여기 꿈도 희망도 없이 그저 서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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