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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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미소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11.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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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겨레학교 최영미의 열아홉, 다시 살아가기 1



비행기가 움찔하더니 곧 이어 이륙하기 시작했다. 땅과 점점 멀어질수록 나는 설렘과 불안 속에 당황하고 있었다.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는 기쁨, 몇 시간 후면 펼쳐질 상상속의 도시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마구 뒤섞여 내 머리를 휘저어 놓았다.


언뜻 건너편 자리에 앉은 아줌마가 책장을 뒤적거리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에 몸을 기울여 들여다봤더니 책을 거꾸로 놓고 열심히 보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긴장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최고의 방책인 것 같은데 나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느라고 괜히 입을 실룩거렸다.


2시간 후 우리 일행은 다른 사람들이 다 내린 뒤 천천히 비행기에서 내렸고, 나는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딛어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다. 차를 타고 시내를 지나갈 때 나는 잡힐까 두려운 듯이 내 눈을 스쳐 지나가는 빌딩들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뚫어지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나의 눈과 정신을 빼앗은 도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혼잡한 거리에서 방황하게 만들었고, 지하철 끝에서 끝으로 하루 종일 기차놀음을 하게 만들었다.


나를 제일 당황하게 만든 것은 바로 눈앞에 펼쳐진 기회를 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선택할 능력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 자신의 무력함에 기가 눌려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집구석에 눌러 앉아 리모컨을 벗 삼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인 채널 바꾸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 없이 TV채널을 돌리다가 희귀병에 걸린 소녀를 돕기 위해 모금활동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소녀의 안타까운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눈물 흘리는 아나운서와 TV 화면에 조금씩 높아지는 숫자들을 보고 나는 콧마루가 찡해 옴을 느꼈다. 크지는 않지만 소중한 마음들이 모여 소녀의 병이 나을 걸 생각하니 내가 마치 그 소녀가 된 듯 감사하기까지 했다. 그 프로그램을 본 후 나는 작으나마 자신감과 용기가 생겼고, 갈 데는 딱히 없었지만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집을 나와 아파트 경비실 앞을 지날 때였다. 웬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낯도 설고 하여 외면하려 했지만 우연찮게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말았다. 왜냐면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웃으셨기 때문이다. 인사는 했지만 전혀 예상 밖의 일이라 얼떨떨했지만 이내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다. 집주변을 어슬렁대면서 줄곧 아까 봤던 경비 할아버지를 떠 올렸다. 할아버지의 꾸밈없는 미소는 어릴 적 조그만 손으로 술을 따르는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으시던 내 할아버지를 생각나게 했다.


나는 북한에서 18년이라는 짧지 않은 생을 살았다. 나를 감싸주었던 굴뚝연기, 할머니의 손 때 묻은 윤기 나는 가마솥, 다는 이해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깊은 한숨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돋아난다. 그때는 당연하게만 여겼던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지금 이렇게 내 안에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고향을 떠나 그것들과 헤어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경비 할아버지의 웃음이 이다지도 내게 긴 여운을 남기는 건 아마도 그것이 내 마음 속 응어리를 녹여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집으로 향하는 걸음은 날 것 같았다. 두려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당장 내일부터 뭐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제법 긴장감도 들었다.


요즘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느라 집에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어쩌다 주말에 집에 갈 때면 동네 떡볶이 집에서 나는 냄새에 푸근함을 느끼기도 한다. 비록 고향은 떠나 왔지만 이로 인해 내 고향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스쳐 지나가는 일상이 훗날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깨닫게 되었다. 이 해가 뉘엿뉘엿 다음 해를 맞이하는 요즘 점점 익숙해져 가는 서울 풍경에 혹시나 고향의 단풍을 잊을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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