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당 창립과 발전의 들보로 사신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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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당 창립과 발전의 들보로 사신 어른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11.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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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가 본 선진 7 / 구타원 이공주 편

구타원九陀圓 이공주李共珠 교무를 처음 뵌 것은 역시 서울교당 다니던 1960년대다. 어쩌다 설법을 하시면 한문이나 한시를 줄줄이 외우시면서 힘도 안 들이고 거침없이 하시었다. 지금도 당시에 들었던 순치황제 출가시 법문이 생생하거니와 한학에 조예있는 남자교무나 할 법한 유식한 법설에 카리스마가 따라붙었던 것 같다. 게다가 구타원님은 그 출신이 예사롭지 않아서 거의 전설적인 인물로 회자되고 있었다. 친가든 외가든 명문가였다든가, 어린 나이에 순종 황후인 윤비의 시독侍讀으로 발탁되어 창덕궁에서 4년이나 궁중법도를 익히고 어학교육을 받았다든가, 이화학당과 경기여고를 다니며 신·구 학문을 두루 익혔다든가, 하나하나가 부러움을 사고 존경을 받을 만하였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 신여성이 청춘에 남편을 잃었다든가, 아들 둘을 두었으나 하나는 어려서 죽고 하나는 촉망받던 영재(박창기)였으나 전쟁 때 학살당했다는 것 등이 구타원님을 무슨 비극영화의 주인공처럼 보이게도 했다. 그런 불운을 딛고 여자로서는 대종사님의 수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또 종교적으로 얼마나 극적인 뒤집기냐! 구타원이란 법호도 여자수위단의 중앙임을 보여주지만, 공주란 법명조차 共珠 아닌 公主로 오해를 받지는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구타원은 자식 몫을 포함하여 남편으로부터 상속받은 땅이 1천여 마지기였고 이것이 거의 다 교단에 투자되었다는 것이다. 젊은 교무들은 교당에 어려운 일이 있을 적마다 구타원님에게 가서 하소연을 하면 도움을 받고는 했던 것으로 안다.


<원불교법훈록>에 「구타원 종사는 정신·육신·물질을 다 바쳐서 대종사님의 법을 받들고, 교단을 발전시키기에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교단 창립에 있어서 구타원 종사의 역할은 가히 종횡무진이었다. 별로 배우지도 못하고 재산도 없는 가난한 무산자들에 의해 창립된 원불교 교단이기에 구타원 종사의 지식·인품·재산은 교단 창립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도 남았던 것이다」라고 한 기록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대종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일본 가서 공부하고 문학박사가 되어 여성운동을 하는 게 꿈이라던 구타원님은 글도 잘 쓰셨다. 시가와 논설 등도 많거니와 무엇보다도 대종사님의 법설을 받아 적어 가장 많은 기록을 남겼으니, 대종사님도 “공주는 나의 법 주머니(法囊)다. 나는 공주에게 가장 많이 설해 주었다”고 말씀하셨다.




내게 구타원님은 너무나 높고 멀리 계셨다. 수줍음 많은 내 성격 탓도 있지만 구타원님은 그만큼 우리 회상에서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위상을 지니고 계셨다 함이 맞다. 그래서 일반 교도에게 그분은 신성한 존재로서 혜복이 겸비한 완벽한 인품의 전형처럼 비춰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터에 한번은 어느 교무님의 안내로 나만을 위한 접견 기회를 부여받았다. 이미 연세 아흔을 훌쩍 넘기고 은퇴 생활을 하실 때였다. 큰절을 올리고 가까이 뵙자니 역시 단정하고 깨끗한 용모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는 늘 멀리서 뵙던 모습 그대로였다. 모습을 뵙는 것만으로도 절로 우러러지고 덕화가 느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즈음 건강은 웬만하십니까?”


겨우 그렇게 인사 말씀을 올렸다. 무슨 건강 살피는 의료진도 아니니 글자 그대로 인사이다. 상대로부터 무슨 의미 있는 대답이 나오리라고 기대하고 한 질문도 물론 아니었다.


“그게 그렇지가 못해요.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요.”


전혀 뜻밖의 대답이었다. 원로 법사와 교도의 관계에다 나이조차 47세 연하이니 손자뻘인데 깍듯이 하오를 하시는 것도 송구했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나의 인사성 질문에 진지하게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다”고 고백하신 점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생로병사는 모든 중생이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인 고苦라네. 다만 중생은 몸이 병들면 마음까지 괴로워하지만, 불보살은 심락을 누리고 천상락을 즐기면서 몸의 병고를 잊는 법이라네.” 이쯤으로 태연히 대답하고 빙그레 미소할 듯했다. 그러나 구타원님은 표정조차 찡그리며 아픈 시늉을 숨기지 않으셨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구타원이 판타지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인간 이공주가 아니라 허공에 맴도는 성자 구타원의 허상에 사로잡혀 지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허상을 결정적으로 깨준 사연이 또 하나 있다.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를 인터뷰할 때였다. 귀를 의심할 만큼 놀랄 이야기를 하셨다.


“내가 서울서 총부에 올라가 대종사님 찾아뵐 때 구타원이 얼마나 방해했는지 알아? 육타원 님이 주선해 주지 않았으면 못 만날 일이 많았을 거야.”


듣기 민망할지라도 내 얘기 좀 들어보시라. 추측컨대 대종사님은 청상과부 구타원의 정신적 연인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있긴 했지만, 일곱 살 연하에다 용모가 고운 팔타원에게 구타원은 라이벌 의식을 가졌을 법하지 않은가. 이 대목에서 도인 구타원이 아니라 여자 이공주의 ‘쌩얼’이 분장 없이 드러나게 된다. 실망스럽다고? 쯧쯧! 순진하긴! 성인이나 범부나 본성은 어차피 같다.


“대종사님, 눈치 못 채셨어요?”


내가 여쭙자 대답하셨다.


“내가 그거 몰랐간디!”




어두운 시대에는 사람들이 교조나 성직자를 미화美化하고 성화聖化하고 막판에는 신격화하고서야 직성이 풀렸다. 존경하고 숭배하다 보면 흠결이 없는 완성체로 보고 싶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일종의 우상화 작업이다. 피가 통하고 숨을 쉬는 사람을 죽여서 화석을 만드는 짓이다. 나는 일흔도 안 됐는데 때로 온몸이 아파서 절로 신음이 나올 때가 있다. 아흔을 넘긴 노인이 왜 온몸이 안 아팠으랴. 그걸 감추고 “난 육신의 고락을 초월하여 하나도 아픈 데가 없노라” 했다면 사기꾼이다. 또 삼십대 젊은 과부가 잘 생긴 남자 스승에게 연정을 품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자기보다 젊고 예쁜 여자가 연인 앞에서 알짱거리는 걸 보면 시샘도 할 만하지.


나는 구타원의 인간을 보고서야 그분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감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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