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욕은 장하시나 아깝게 꺾인 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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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은 장하시나 아깝게 꺾인 도인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12.0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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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경식 교도의 내가 본 선진 8 / 처산 김장권 편

내가 처산處山 김장권金壯權 교무를 처음 만난 것은 1966년, 그 분이 춘천교당에 계실 때였다. 나는 군에서 제대하여 처음 직장으로 춘천고등학교 교사 발령을 받았던 터였다. 당시 춘천교당은 강원도 첫 교당으로서 곤궁하게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처산님의 가르침 따라 새벽 좌선에도 꼬박꼬박 나가며 교당생활에 재미를 붙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내가 전근으로 춘천을 떠나면서 처산님과는 일단 헤어졌으나 훗날 경기도 평택으로 옮기고 나서 또 처산님을 만나게 된다. 당시 평택에는 교당이 없어서 나는 아내와 함께 서울교당, 수원교당을 거쳐 천안교당에 나가고 있었다.


천안교당 교무님은 겨우겨우 셋방 교당을 지키며 참 간고한 생활을 하고 계셨지만 불평 없이 교화에 매진하셨다. 신심이 있을 턱이 없는데도 마지못해 ‘하늘같은 남편’을 따라 교당을 다니던 아내가 이 교무님을 보면서 교무에 대한 인식이 무척 달라졌다. 부엌엘 들어가 보니 식생활의 절약이 상상을 초월하더란다. 또 빨래를 개어드리다가 보니 하도 여러 번 빨아서 내복에 구멍이 숭숭 났더란다. 아내도 허구헌날 콩나물과 김치만 먹고, 시집올 때 해온 유행 지난 옷만 입던 처지지만 교무님의 눈물겨운 절약정신을 보고는 끔찍이 감동 먹은 눈치였다. 시외버스를 타고 터미널에서 내려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교당에 다니던 아내가 내게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 시내버스 타지 말고 걸어가요. 차비라도 아끼면 교무님 계란이라도 한 줄 사다드릴 수 있지 않아요?” 마침내 아내에게 신심이 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처산님이 수원교당에 부임하셨다.


처산님은 나를 보자, 너 잘 만났다 하는 듯이 나보고 평택에 교당을 세우자고 꼬드기셨다. “교도도 없는데 어떻게 교당을 세워요?” “물고기가 먼저 있어서만 방죽을 파간디? 웅덩이를 파놓으면 없던 고기가 생기기도 하고 딴 데 있던 고기가 모여 들기도 하는 법이오.” 나는 빚을 얻어 겨우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처지에 아이는 이미 형제나 두고 있었기에 근근이 먹고사는 처지였다. 그래도 원불교 얘기라면 워낙 귀가 얇았다. 평택에서 수원이나 천안까지 다니기가 수월찮은 터에 평택에 교당이 선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꿈같은 일이었다. 아! 이때 처산 님의 꼬드김에 넘어간 이 대책 없는 가장이 얼결에 평택교당을 창립하고 나서 얼마나 고통 받고 얼마나 후회를 해야 했는지! (이렇게 말하면 그나마 몇 푼어치도 안 되는 공덕이 날아갈 텐데 내가 왜 이러지?)


우선 처산님을 격주로 모시고 출장법회를 보기 시작하였다. 1975년이었다. 이듬해 1월, 수원교당의 도움을 받고 내 재력(?)을 총동원하여, 폐기된 수리조합 건물을 전세로 얻었다. 마당에 텃밭에 대청마루가 넓어서 얻긴 했지만, 이 낡은 건물을 수리하느라 엄청 고생하였다. 온갖 쓰레기를 치우고 리모델링을 하고 칠과 도배를 하고…, 일이 한도 끝도 없었다. 기술자 동원하고 일꾼 사서 하면 좋으련만 비용 아끼느라 몸으로 때운 일이 많았다. 겨우 수리를 마치고 나니 곧 오신다던 교무님 발령이 안 났다. 그 사이 마음고생은 수리 때문에 하던 고생과는 또 비교가 안 됐다.


겨우 말끔하게 수리를 마친 집에 주인이 살지 않는다는 걸 눈치 챈 넝마주이들이 허술한 대문을 넘어 수시로 드나들며 집어 가는데 난감하기가 짝이 없었다. 말이 넝마주이이지 반쯤 도둑이어서 돈 될 만한 물건은 있는 대로 떼어가고 주워 가는 판이었다.


특히 철물이 인기여서 연탄아궁이 철제 뚜껑은 떼어 가면 새로 사 놓고, 사 놓으면 다시 떼어 가고, 또 사 놓고 그러면 또 떼어가는 숨바꼭질을 몇 차례나 했다. 하는 수 없이 처산 님이 추천한 홀아비 교도 한 분에게 부탁하여 집을 지키게 했다. 그러자 이번엔 조석으로 이 사람 밥을 해먹여야 하는 아내가 죽을 맛이었다.


겨우 4월에 교무님이 오시니 이제 한숨 돌렸다 싶었는데, 웬걸! 이제부터가 죽을 맛이다. 나름대로 교화에 몸바치다 이제 고인이 되신 분에게 누가 되는 말은 할 짓이 아니지만, 이 분은 경기도 사람들이 원불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당시 그들에게 원불교는 이름조차 듣도 보도 못한 단체였고, 고작해야 전라도 개똥쇠들이 믿는 유사종교였다. 가구나 생활 용품에 대한 미적 안목이 각별한 이 분은 초라한 교당 살림살이에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새내기 교무님은 장밋빛 꿈을 안고 처음 나온 교화장에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10년을 오기로 버티어 뿌리를 내리게 한 분이니 고맙기 이를 데 없지만, 당시엔 우리 내외가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 적지 않았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아내는 어느 날 끝내 불만이 폭발했다. 나 이렇게는 정말 못 살아! 겨우 신심이 붙는다 싶었는데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봉불식 날이 되었다. 이래저래 몸고생 마음고생에 말 못할 사연이 누적되어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정문에서 하객 맞이를 하다가 천안 교무님이 나타나자 우리 내외가 그만 동시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참 어이가 없었다.


평택을 떠나기까지 3년 동안 겪은 고통은 말하기도 싫지만, 맛보기로 두 가지만 하고 가자. 하나는 빈집 지켜주던 교도님이 그 후로도 우리 집을 종종 찾아와 숙식을 하며 취직을 시켜달라고 보채는 데야 참으로 미칠 노릇이다. 나하고 의형제를 맺자는 둥 비빌 언덕 하나 잘 만났다는 투였는데 견디다 못해 싫은 소릴 하니 서운하다며 떠났다. 또 한 번은 지방교도라는 어떤 젊은이가 찾아왔는데 자기가 평택에 취업하고 있다며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교도라면 지푸라기라도 잡던 처지라 반갑게 대해주었더니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무슨 공사를 따게 해달라고 통사정이다. 내 평생 이권 청탁 같은 것은 죽어도 할 줄 모르는 꽁생원이지만, 애송이 평교사가 그때 무슨 힘으로 학교에다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말인가. 그는 공사를 따게 안 해 주었다고 서운하다며 역시 교당을 떠났다.


믿느니 처산님이요 하소연할 분도 처산님인데 그나마 이 분이 창립 1년 만에 수원을 떠나 서울 중구교당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겨우 하신 말씀이 이랬다. “정산 종사 말씀에, 교당 하나 만들면 삼세 업장이 다 녹는다고 했응게 잘 해보소.”



중구교당을 찾아 인사를 드릴 때, 내가 검정고시출신이라 고졸 학력으로 고등학교 교사를 하는 콤플렉스랑, 학문에 대한 열망뿐으로 나이만 먹어가는 조바심이랑 고백을 했다. 처산님은 “길이 있겠지. 예로부터 사십에 문장 난다는 말이 있으니 너무 걱정 마소.” 하고 다독이셨다. 안됐다 싶으니까 립 서비스라도 하시는 거려니 생각하면서도 적잖이 위안이 되었다.


평택교당 창립 3년을 지내자 드디어 내게 다시 학업을 시작할 기회가 왔다. 야간대학에 들어갔고, 나는 나이 사십에 겨우 학사가 되었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석·박사과정까지 죽어라고 달렸다. 드디어 학위논문이 통과되었을 때 나는, 처산님이 계시다면 누구보다도 기뻐하셨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고인이 된 그분이 몹시 그리웠다. 초혼招魂하여 대화한다면 어땠을까?


“내가 뭐랬소? 사십에 문장 난다고 혔지!”


“교무님, 사십이 아니라 저는 벌써 마흔 여섯인걸요. 문장이란 호칭도 과하고 그냥 논문 하나 쓴 건데요 뭘!”


“이경식 박사! 여기서 말하는 사십이란 말은 사십대란 뜻이오. 그리고 문장이란 게 어디 그냥 글 솜씨나 좀 있다는 뜻이간디?”


“그건 그렇다 치고, 평택 교당 만들던 일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합니다. 교당 창립 그거 못 할 짓입니다.”


“그런 소리 마소. 달랑 고등학교 졸업장 하나 가지고 끙끙대던 훈장이 한 달음에 박사 됐는데 그런 기적이 거저 일어난 줄 아시오? 그게 바로 삼세 업장을 녹인 교당 창립 공덕인 줄이나 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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