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공회장 8년, 나를 위해 살아온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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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공회장 8년, 나를 위해 살아온 세월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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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터뷰 / 김미진 전 서울봉공회장

서울봉공회를 이끌던 김미진 회장(전농교당)이 회장직에서 물러났다는 얘기를 들은 뒤, 이제야 좀 한가해지시려나, 생각했더랬다. 내년 3월 중앙봉공회 총회까지는 여전히 전국 봉공회의 대표지만, 그래도 서울과 전국을 다 맡았다가 하나라도 놓았으니 말이다. 그것도 8년, 강산도 꿈틀 댈 세월이다.


“연탄 7집 배달하고 나서 기름 3집 드렸는데 골목이 작아서 좀 오래걸렸네요.”


못 말린다. 전 회장이나 고문 격으로 아침부터 인근 가정 난방비 지원하느라 손수 연탄 나르고, 또 기름 배달에 뒷정리까지 하는 그녀다.


“회장 내려놓았으니 이제 더 신나게 해야지요. 하고 싶었던 게 정말 봉공활동만 열심히 해보는 거였거든요.”


김혜전 전 서울봉공회장(강남교당)이 지명하다시피 회장이 됐던 그녀의 바람이었던 것. 임기 중 30주년 기념행사, 헌혈운동, 은혜의 김치나눔운동, 지역교화 위한 지원금 제도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실행했으며, 동시에 봉공회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제가 잘 하는 말이 ‘할 수 있을 때 하자’에요. 누군가가 불러주는 사람,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하죠. 그게 회장 하는 동안 가장 행복했어요.”


그녀는 기존의 활동들 외에 전국 연합 프로그램에 집중해 왔다. 원봉공회 법인을 만들어 김치엑스포, 인도네시아 지진해일, 태안참사, 수해 등 각종 재난재해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원불교를 대사회적으로 크게 드러나기도 했다. 봉공회원들의 분홍색 조끼는 멀리서도 숫자가 적어도 티가 확 났고, ‘정성스럽기로는’ 유명했다.


몇 년 전 연천 수해 현장에 가보니 수재민이 먹을 게 없더란다. 한끼라도 해주자, 하고 갔다가 어느새 매일 하루 세끼 꼬박꼬박 서울에서 출퇴근하며 밥을 해주고 있었다. 아예 전곡교당에 살았다는 김미진 전 회장과 봉공회원들. 그리고 그녀는 이제 그 시절을 ‘참 재밌고 기쁘게 했다’고 회고한다.


“회장을 하는 내내 무료급식을 꼭 하고 싶었어요. 재난재해 현장에 가면 먹는 문제가 참 심각하거든요. 춥고 배고픈 이들의 허기를 달래주고 든든히 먹여보내며 교화하는 거지요. IMF 시절 흑석동 서울회관 앞에서 무료급식을 했었는데 배우고 느끼는 바가 많았지요.”


서울시내 뿐 아니라 산간도서까지 들어가 몇백명의 밥을 지을 수 있는 밥차가 그녀의 구체적인 꿈이었다. 어디든 달려가, 특히 무료급식이 잘 없는 새벽밥을 해먹이고 싶었다는 김 전 회장. 서울봉공회장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그 방법을 모색 중이다.


“어떤 일이든 두렵다거나 걱정을 안해요. 한 사람이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또 있고, 공중사에는 다 되는 이치가 있더라고요. 그러니 모든 일들과 인연들이 다 감사고 은혜지요.”


천상 웃는 낯의 부처가 되어버린 김미진 전 회장. 40대 초반 처음 봉공회 시작했을 때 자신을 도와주던 김재성(가락교당)교도와 함께 ‘남편 생일보다도 원불교가 먼저, 애들 대학 원서보다도 봉공회가 먼저’였던 아내이자 엄마를 이해해준 가족들에게 고마워했다.


아이들은 “엄마 섭섭하지 않아?”라며 “엄마도 이제 엄마를 위해서 살아야지”했단다. 그런 아이들에게 그녀의 답은 이러했다. “무슨 소리야, 이제까지도 엄마는 엄마를 위해서 살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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