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니 재가니 하는 상을 떨치신 큰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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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니 재가니 하는 상을 떨치신 큰어른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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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경식 교도의 내가 본 선진 9 / 팔타원 황정신행 편

내가 팔타원님을 처음 뵈온 것은 입교하던 무렵 서울교당에서였다. 환갑 무렵, 한복으로 곱게 차려 입고 종종 법회에 나오셨는데 나 같은 애송이한테야 눈길 한번 주실 일이 없었고 나 역시 앞에 나서 인사 여쭐 숫기도 없었다. 기독교에서 개종하게 된 사연이랑 대종사님과의 일화 등이 회자되었고, 교단 최초에 당시까진 유일한 대호법, 화제의 영화 <전송가戰頌歌>의 실제 여주인공, 이승만 대통령도 각별히 챙긴 사회사업가 등등 훌륭한 어른이라는 말씀이야 교무님으로부터 많이 들었지만, 내가 서울교당을 떠난 후 이상하게도 다시는 가까이 뵐 기회는 없었다.


그 후 거의 이십 년이나 지나 만나 뵌 것이 송추 한국보육원에서였던가 싶다. 무슨 건축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때였는데 인부 두엇이 일을 하고 있는 곳을 들여다보시던 팔타원님은 공사 진척이 더디다고 인부들을 나무라셨다. 그 중 늙수그레한 남자가 무엇이라 변명을 하며 추가적 배려를 요구하였지만 팔타원님은 약속을 안 지키고 부당한 요구를 한다며 단호하게 꾸짖으셨다. 나는 의외다 싶었다. 법이 높은 어른이시면 자비심이 많다고 들었는데, 수고 많다고 좀 따뜻한 격려나 하고 나서 덕 있게 설득하면 될 것을 뭐 그리 매몰차게 나무라시나 싶었다. 비굴하게 굽실거리며 변명하던 늙은 인부의 깡마르고 주름진 얼굴이 오래 뇌리에 남아 내 마음을 언짢게 했다.


내가 대종사님의 전기소설《소태산 박중빈》을 낸 것은 2004년이었다. 그 과정에서 팔타원 황정신행, 인간 황온순에 관한 자료 수집도 적지 않았다. 두세 차례 인터뷰도 가졌다.


팔타원은 조선과 중국과 영국에서 수학하고, 미국 등 구미 각국을 시찰하며 경륜을 쌓은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그 어렵던 식민지시대에도 순천상회, 동대문부인병원, 부동산 투자 등 통 큰 여성 실업인이기도 했다. 해방 혼란기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버려진 전쟁고아들을 보살피며 보화원과 한국보육원으로 고아보육의 새 역사를 써온 걸출한 사회사업가이기도 하였다. 남들이라면 하던 일도 접을 68세에 학교법인을 설립하고 휘경여중·여고를 개교한 교육사업가이기도 했다. 이승만, 김구, 김활란, 이광수 같은 당대의 각계 거물들과 가까이 지낸 여류명사이기도 했다. 남들이 몰라보는 대종사의 인물을 알아보고 원불교를 위해서라면 막대한 재산을 쾌척할 만큼 씀씀이가 큰 재산가이기도 했다.


이런 어른이라면 대인 관계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버릇없고 비뚤어진 자녀를 대책 없이 용서나 하고 눈물로 하소연하는 방식은 한 가정의 어머니에게나 기대할 일이지, 팔타원 같은 분에게 그런 온정주의는 결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송추 보육원에서 있던 일을 알만했다. 인부를 많이 부려본 사람이라면 소위 기술자 근성이라는 것을 안다. 그들의 부당한 요구나 고의적 태업에는 당근이 아니라 채찍이 필요하다는 것을. 팔타원이 가족이나 직원에게 어느 때는 지나칠 이만큼 냉정하고 단호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안다. 그런 결단력이 없고 온정에 끌려 우유부단하게 취사를 했다면 그런 큰일들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해냈을 것인가.


팔타원 황정신행(온순) 님은 1903년 황해도 연안에서 황원준님과 송귀중화님을 어버이로 하여 태어났다. 개화의식이 강한 부모님 덕분에 신교육을 받아 이화학당, 경성여고보 등을 다니다가 만주 길림성여자사범학교를 나오고 다시 이화여전 보육과를 졸업하니 2회 졸업생이었다. 유치원 교사를 하다가 장안갑부 강익하와 결혼한 후, 포목점 순천상회를 직접 경영하기도 하며 유족한 생활을 하였다. 생의 회의에 빠져 어린 아들과 금강산을 찾으며 방황하던 차 개성교당 이천륜 교도를 만나 불법연구회(원불교)를 소개받고 대종사 친견의 기회도 갖게 되면서 법열에 찬 삶을 시작하였다. 본래 기독교도였지만 대종사를 뵈온 후 신성을 바치고 무상보시를 실행하여 회상 최초의 대호법이 되도록 큰 업적을 쌓았다. 해방과 더불어 교단 보육원인 보화원에서 고아를 키우기 시작하여 한국전쟁 와중에 한국보육원 원장으로서 수많은 전쟁고아를 키워내며 이후 대표적 사회사업가로 존경을 받았으나 전쟁 중에 외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70년에 학교법인 휘경학원을 설립하며 보육사업과 더불어 육영사업의 새 장을 열었으니 휘경여자중·고등학교가 그 결실이었다. 2004년 102세로 열반, 거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어느해였던가? 서울회관에서 신년하례 행사를 하는데 팔타원님 법설을 받들게 되었었다. 그런데 이 어른이 단단히 노여우셨던가 싶다. 단상 설치부터 시작하여 행사 준비가 부실하다고 꾸짖기 시작하시는데 하시라는 법설은 아니하고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꾸중만 하신다. 담당자들이 죄송스러워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서울교구의 내로라 하는 출가 교무들이 총집합을 한 자리인데 끝없이 호통을 치신다. 참다못했던지 시타원 심익순 교무님이 앞에 나서서 합장 공경하면서, 저희가 잘못했으니 이제 그만 용서하시고 노여움을 거두시라고 누누이 말씀을 여쭙지만 어림없다.


그러고 보면, 사부대중을 앉혀놓고 감히 재가가 그것도 여자가 강단에 선다는 것부터 불가능한 일이지만, 감히 출가승단을 향해 호통을 친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가톨릭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신부를 제쳐놓고 수녀조차 안 되는데 하물며 신자가, 그것도 여자 신자가 강단에 선다는 것이 가능한가? 더구나 신부를 놓고 꾸중을 한다니 꿈같은 얘기다.


나는 재가 팔타원이 출가 교무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장시간 훈계하고 호통칠 수 있는 이 풍토야말로 우리 교법이 후천 개벽시대의 종교임을 확신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그 장면이 감격스러워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있다. 그 행사의 내용도 연도도 잊었지만 그 감동적인 장면은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것이다. 출가 재가를 가리지 않고 법위가 위상을 결정하는 이 법이야말로 대법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선천과 후천의 차이요 영산회상과 용화회상의 차이이기도 하다.


팔타원 님을 생각하면, 그분은 여자지만 자모는 물론 엄부까지 뛰어넘고, 재가지만 출가를 무더기로 앉혀 놓고 호통 치는 큰 인물이었음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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